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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의 지시를 받고 요동성 지원에 나섰던 고돌발은 이미 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고 백암성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고돌발이 성안으로 들어서자 백암성주 손대음(孫代音)이 나와 맞이했다. 그는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후예로 영류왕의 총애를 받던 신하였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하고 권력을 장악하자 하루아침에 목숨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다행히 대막리지의 관용으로 무사할 수 있었지만 중앙의 요직에서 밀려나 백암성의 성주로 좌천됐다.
손대음은 어쩔 수 없이 백암성으로 부임하기는 했지만 성을 돌볼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매일 같이 술이나 마시고 거문고를 타며 세월을 보냈다. 그의 거문고 연주는 당대 제일이라 불리며 많은 사람의 귀를 즐겁게 했다. 그렇지만 백암에서의 연주는 인근 백성을 비탄과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당나라의 침입에 대비해 성의 방비를 강화하라는 지시가 내려오자 손대음은 주변의 눈을 의식해 성곽을 정비했다. 하지만 굳이 목숨을 걸고 나라에 충성하겠다는 각오는 없었다. 그러다가 당군이 개모성과 요동성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이 들리자 다른 마음이 생겼다. 어차피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마당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이유는 없었다. 그보다는 당나라에 투항하여 일신의 안위라도 챙기는 게 나았다.
생각이 여기에 미친 손대음은 은밀히 당군 진영에 사람을 보내 항복의 뜻을 밝혔다. 그의 전갈을 받은 당 태종은 기뻐하며 군사를 이끌고 백암성으로 향했다. 이런 차에 고돌발이 휘하 군사들을 이끌고 들이닥친 것이다.
손대음은 고돌발의 강직한 성품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차마 함께 항복하자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고돌발은 성주로부터 지휘권을 넘겨받아 당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며칠 후 드디어 당군이 새까맣게 몰려들었다. 이젠 어떤 식으로든 결판을 내야 했다. 그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종자를 보내 고돌발을 청했다.
고돌발이 당도하자 성주는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당주 이세민이 이끄는 군대는 그 수효가 많고 기세가 대단하오. 오죽하면 난공불락이라 일컬어지는 요동성이 함락됐겠소. 우리의 힘으로는 그들을 대적할 수 없소.”
고돌발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러면 항복이라도 하자는 말씀이오?”
그의 손이 어느새 칼자루에 가 있었다.
손대음은 순간 움찔했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장군께 무슨 대책이라도 있나 듣자는 거요.”
그제야 고돌발은 인상을 폈다.
“이곳 백암성은 평지성인 요동성과는 다르오. 높고 험한 산 위에 있어 군사 1000명만 있어도 충분히 지킬 수 있소. 그들이 자랑하는 포차도 여기서는 무용지물이오. 백만 대군이 몰려온다 해도 이 성은 끄떡없을 것이오.”
손대음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그리 생각했지만, 적의 기세가 워낙 거세다 보니 걱정이 앞섰구려.”
고돌발이 눈을 부라리며 장담한다.
“이 성에는 충분한 식량과 무기가 있고 성민 모두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준비가 되어 있소. 그런데 무슨 걱정이 그리 많소?”
성주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선봉대의 뒤를 따라 백암성 아래에 도착한 당 태종은 성곽을 올려다보고 놀랐다. 가파른 산 중턱을 돌아가며 성벽을 쌓았는데 동남으로는 태자하와 맞닿아 있고 다른 방면은 가파른 절벽으로 되어 있었다. 성의 둘레가 5리쯤 되는데 접근할 길은 오직 서쪽뿐이었다. 이 성이야말로 천험의 요새라 불릴 만했다.
태종은 백암성주의 사자로부터 항복하겠다는 뜻을 전해 듣기는 했지만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유인책이거나 마음이 변할 수도 있었다. 그는 대총관 이세적을 성으로 보내 항복을 종용케 했다.
대총관은 서남쪽 성벽 가까이 접근해서 외쳤다.
“황군이 왔으니 어서 문을 열고 항복하라!”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던 고돌발이 코웃음을 쳤다.
“말만 하면 성문이 열린다더냐. 정녕 이 성을 원한다면 당주 이세민의 목을 가져오너라! 그럼 내 한번 생각해 보겠다.”
이세적은 고돌발의 야유를 듣고 분노를 터뜨렸다.
“감히 우리 폐하를 능멸하다니. 네놈을 가만두지 않겠다!”
이세적에게 돌아온 답은 화살 세례뿐이었다.
대총관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당 태종은 자신이 속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당장 총공격을 명했다.
당군이 성벽을 기어오르자 고구려 군사들은 화살을 날리고 바위를 굴렸다. 당나라 군사들은 삽시간에 화살에 맞고 바위에 깔려 무수히 죽어 나갔다. 공격이 여의치 않자 태종은 북을 울려 군사를 물렸다.
영채로 돌아온 태종은 장수들과 함께 상의했다. 하지만 별달리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높은 산 위에 자리했기에 요동성에서 위력을 발휘했던 포차도 소용없었다. 이렇듯 백암성은 매우 험난한 요새였기에 백만 대군이 달려든다 한들 별 소용이 없었다.
한참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시위장이 들어오더니 백암성주가 보낸 밀사가 당도했다고 알렸다.
당태종은 수작이 의심스러웠지만 일단 사자를 들이게 했다.
밀사는 조심스럽게 손대음의 뜻을 전했다.
“성주는 항복하기를 원했지만 다른 장수들이 반대하여 뜻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당태종은 짐짓 노기를 띠며 사자를 꾸짖었다.
“아직도 짐을 농락하려 드느냐! 내 백암성을 함락시키면 살아 있는 것의 씨를 전부 말릴 것이다!”
사자가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
“선량한 백성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그저 우매한 몇몇 장수가 방해하는 바람에 일이 틀어진 것이니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곧 그들을 설득하여 성문을 열겠습니다.”
태종은 그제야 화를 누그러뜨렸다.
“백암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하지만 성주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갸륵하니 한 번은 기다려 주겠다. 만약 다시 짐을 우롱할 시에는 성안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사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공손히 읍하고 성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당 태종은 이세적과 함께 백암성 서남쪽 성벽으로 다가갔다.
성루에 있던 고돌발이 당 태종을 발견하고 외쳤다.
“저자가 이세민이다! 저자를 향해 활을 쏴라!”
수백 대의 화살이 태종을 향해 날아왔다. 그는 황급히 뒤로 물러나서 총진격하라는 명을 내렸다. 당나라 군사들은 일제히 성벽을 향해 달려들었다. 성벽 위에서 화살과 바윗돌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당군 역시 성 위로 화살을 마구 쏘아댔다. 성벽 위에 있던 고구려 군사 중에도 화살에 맞아 죽는 자가 속출했다.
치열한 공방전은 저녁때까지 계속됐다. 날이 어두워지자 당 태종은 군사를 물려 영채로 돌아왔다.
태종은 백암성주에게 두 번이나 속은 것이 분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간신히 분기를 삭이고 있는데 시종이 들어와 백암성에서 또다시 사자가 왔다고 일렀다. 당 태종은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 들고 사자를 들이게 했다.
사자가 안으로 들어서자 태종은 칼을 겨누고 으르릉거렸다.
“네놈들이 두 번씩이나 짐을 속이고도 무사하기를 바라느냐?”
사자는 쩔쩔매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고돌발이 강경하게 반대하는 통에 성주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아무래도 계교를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저에게 당나라 깃발을 주십시오. 내일 당기를 성벽 위에 내걸면 군사들이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할 겁니다.”
태종은 사자가 말한 계책을 그럴듯하게 여겼다.
사자에게 당기 수십 개를 줘 돌려보낸 후 당 태종은 대총관을 불러 지시했다.
“내일 백암성주가 성 위에 당기를 세울 것이다. 그러면 고구려군이 혼란에 빠질 테니 그때를 놓치지 말고 성을 함락시켜라.”
다음 날 날이 밝자 전투가 개시됐다. 한참 공방전이 펼쳐지고 있을 때 성벽 곳곳에서 당기가 올랐다. 바람에 펄럭이는 적군 깃발을 본 고구려 군사들은 당군이 성벽을 점령했다고 생각했다. 사기가 꺾인 그들이 주춤하자 당나라 군사들은 이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성벽을 기어올라 고구려군을 제압했다.
잠시 후 서쪽 성문이 열렸고 이를 통해 수많은 당군이 노도와 같이 밀려들었다. 성안을 다니면서 군사들을 독려하던 고돌발은 서쪽 성벽 위에서 당나라 깃발이 나부끼는 것을 보았다.
순간, 그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백암성이 이리 쉽게 적군에게 점령당하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부에 배신자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 생각하니 성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연개소문이 손대음을 잘 감시하라고 했던 말도 생각났다. 그를 방치해 둔 탓에 이런 참혹한 일이 벌어졌다면 자신의 잘못이 컸다. 그는 뼈아프게 후회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고돌발은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심한 끝에 당 태종을 찾아 죽이기로 했다. 그러면 훼손된 명예를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당군의 눈을 피해 줄사다리를 이용해서 성 밖으로 빠져나갔다. 땅에 내려서자마자 지나가는 당나라 장수를 베어 넘기고 말을 빼앗아 탔다. 그러고 나서 들떠 있는 당군 사이를 누비며 당 태종을 찾아다녔다.
태종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한참을 찾아 헤매다 보니 돌궐족 가한 계필하력의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고돌발의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고구려를 배신하고 당나라에 붙은 돌궐 놈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긴 칼을 비껴들고 계필하력을 향해 달려갔다. 워낙 무서운 기세로 들이닥쳤기에 돌궐 군사들은 놀라서 길을 비켜섰다.
고돌발은 마침내 계필하력 앞에 당도했다.
“네 이놈!”
벼락같은 호통과 함께 고돌발의 칼이 계필하력이 탄 말의 목을 내리쳤다. 돌궐 가한은 순간 몸을 날려 말 등에서 뛰어내렸다. 말의 머리가 댕강 잘려나가더니 목에서 시뻘건 피가 용솟음쳤다. 말의 피를 온몸에 뒤집어쓴 고돌발은 그대로 솟구쳐서 가한의 어깨를 칼로 내리쳤다. 계필하력은 몸을 피하다가 옆으로 넘어지면서 옆구리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고돌발도 몸이 쏠리면서 바닥을 굴렀다. 그제야 비로소 주위에 있던 군사들이 몰려들어 그를 포박했다.
고돌발은 당 태종 앞으로 끌려갔다. 태종은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싸운 고돌발의 의기를 높이 샀다. 그래서 그를 죽이지 않고 풀어 주게 했다.
고돌발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고구려의 무인(武人)이다. 패장이 무슨 면목으로 살기를 바라겠느냐!”
그는 옆에 서 있던 당나라 군사의 칼을 빼앗아 자신의 목을 찔렀다. 이로써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용장은 백암성과 함께 생을 마감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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