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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하순, 달 없는 밤이었다. 장량은 2백여 척의 함대를 이끌고 연안을 따라가다가 건안성 부근 해안에 닿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구려 군사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상륙한 당군은 내심 고구려군을 깔보게 됐다.
장량의 군대는 거침없이 진군해서 건안성 앞에 당도했다. 성 주변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장량이 웃으면서 기염을 토했다.
“건안성의 기동부가 지모(智謀)가 뛰어난 명장이라더니 헛된 명성이구나. 그저 겁이 많은 졸장부에 지나지 않는구나.”
장량의 야유에 수하 장수들도 덩달아 맞장구를 쳤다.
“우리가 무서워서 성안에 틀어박혀 있는 모양입니다.”
장량은 군사들에게 진지를 구축하라 명했다. 긴장이 풀린 당군은 경계를 소홀히 한 채 영채를 세우고, 밥을 지어 먹기 위해 땔감을 구하러 돌아다녔다.
이때였다. 갑자기 북소리가 들리더니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방심하고 있던 당나라 군사들은 미처 방어할 새도 없이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한바탕 화살 공격이 끝나자 이번에는 숲속에 매복해 있던 고구려 군사가 쏟아져 나왔다.
넋이 나가 우왕좌왕하고 있던 당나라의 장졸은 고구려군이 휘두르는 창칼의 먹이가 됐다. 고구려 군사들은 당군이 정신 차릴 틈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자 부장 장금수(張金樹)가 대총관에게 달려와 대책을 물었다. 장량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지고 안면근육이 마비되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만 부릅뜨고 말 위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장금수는 대총관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물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장량은 그것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가 도저히 지휘할 상태가 아님을 깨달은 부장은 할 수 없이 나서서 대신 군사들을 지휘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장금수가 뛰어난 임기응변을 갖춘 장수라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그는 혼란에 휩싸여 있는 당나라 군사들에게 외쳤다.
“봐라. 우리 대총관께서는 고구려군의 기습에도 당황하지 않고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계시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느냐? 고구려군의 수효는 얼마 되지 않는다. 겁먹지 말고 맞서 싸워라.”
당군은 위급한 상황에도 의연한 수장의 모습을 보고 용기를 얻었다. 그제야 장금수가 지휘하는 대로 움직이면서 고구려군에 맞섰다. 그러나 기선을 제압당한 그들이 전세를 역전시키기는 어려웠다.
장금수는 어쩔 수 없이 퇴각을 명했다.
당군이 후퇴를 시작하자 선봉에 서서 군사를 지휘하던 건안성주 기동부는 앞장서서 말을 달리며 외쳤다.
“저 도적들을 한 놈도 살려 보내서는 안 된다. 적장 장량을 잡는 자에게는 백금(百金)을 내리겠다.”
기동부가 무서운 기세로 당나라 장수 여러 명을 베어 넘기자 당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고구려군이 점점 장량에게 접근해 오고 있을 때 온몸에 피범벅을 한 방효태가 달려왔다. 그는 급히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대총관을 자신의 말 위에 태웠다.
그러고는 장금수를 돌아보며 일렀다.
“내가 여기서 고구려군을 막고 있을 테니 그 사이 대총관을 모시고 빠져나가시오.”
방효태는 비장한 함성을 지르며 뛰어나갔다.
이날 벌어진 전투는 고구려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당군은 장수만 수십이 죽고 군사 1만5000명을 잃었다. 고구려군은 겨우 2000여 명의 사상자가 났을 뿐이었다.
패잔병을 이끌고 요하 하구로 도망친 장량은 군사를 점고해 보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했다.
“살아남은 자가 절반도 되지 않을 정도로 대패했구나. 내 무슨 면목으로 폐하를 뵐 수 있겠는가.”
그는 칼을 뽑아 자기 목을 겨누었다. 그런데 막상 죽으려니 겁이 났다. 그가 머뭇거리고 있는데 장금수가 달려와 말렸다. 장량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며 못 이기는 척 칼을 내려놓았다.
부장이 장량을 위로했다.
“패배는 병가에서 늘 있는 일이라 하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패배의 아픔을 곱씹는 게 아니라 전열을 정비하여 고구려군에게 복수하는 겁니다.”
천행으로 살아 돌아온 방효태가 대총관에게 말했다.
“여기서 배수(背水)의 진을 치고 본진에 전령을 보내 구원군을 요청하십시오. 전력을 기울이면 저들을 꺾을 수 있습니다.”
부하들의 격려에 용기를 얻은 장량은 심기일전하여 군사를 정비하고 당 태종에게 전령을 보냈다.
장산 군도의 석성도에 자리한 고구려 해군의 본영에는 연일 첩보가 날아들었다. 이를 통해 온사문은 당나라 선단의 움직임을 소상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온사문은 부장 석조를 불렀다.
“장량이 건안성으로 이동했다는군.”
부장은 활기가 넘쳤다.
“장량이 떠났다면 우리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입니다. 이 틈에 비사성을 탈환하는 겁니다.”
“묘도 군도와 산동의 등주에 주둔하고 있는 당군의 전력은 어떠한가?”
“묘도 군도에는 당군의 보급창이 있는데, 지키는 군사가 500명 정도 됩니다. 등주에는 전선을 건조하는 대규모 조선소와 해로를 통해 요동으로 보낼 군량을 보관하는 창고 수십 채가 있어서 경비가 삼엄합니다. 내·외곽을 합쳐 3000여 명의 군사가 주둔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전함과 군사는 어느 정도 되나?”
“현재 압록수 분영에서 지원차 나와 있는 병선 50척을 합하면 함선이 500여 척이고, 군사는 1만5000명 정도입니다. 모든 배에는 사거리를 늘린 쇠뇌가 장착되어 있고, 당선보다 작지만 훨씬 빠릅니다.”
“좋다. 내일 해가 뜨면 당장 출항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 마침 내일 밤이 그믐이니 비사성의 당군에게 들키지 않고 해안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석조가 들뜬 얼굴로 대답했다.
“이번에 우리가 비사성 앞바다만 되찾는다면 해로를 통한 당군의 보급을 차단할 수 있을 겁니다.”
온사문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소리를 낮췄다.
“비사성 앞바다를 장악한 후에는 곧바로 등주로 나아갈 것이다.”
바다 건너 산동반도에 자리한 등주를 치겠다는 뜻이었다.
“지난번 장군의 밀명을 받고 철저히 준비해 두었습니다.”
석조는 첩자를 통해 입수한 등주의 지도를 펼쳐 보였다. 그 안에는 항구·관청·조선소·병기창·양곡창 등이 꼼꼼히 표기되어 있었다.
그는 지도를 가리키며 등주에 주둔한 당군의 현황을 설명하고 나서 말했다.
“등주를 공격하려면 대막리지의 재가가 필요합니다. 며칠 전에 본부가 있는 오골성에 파발을 띄웠지만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전령이 올 때까지 기다려 보자.”
부장이 나가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연개소문에게 갔던 전령이 돌아왔다. 그는 등주 공격을 허락한다는 내용이 담긴 대막리지의 친서를 전했다. 이를 본 온사문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드디어 고구려 해군의 위력을 보여 줄 때가 온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고구려 해군은 장수의 지시에 따라 염초 더미와 유황 뭉치를 배에 가득 실었다. 그리고 쇠뇌와 기름을 듬뿍 먹인 천을 두른 불화살까지 실은 후에 비사성을 향해 호기롭게 출항했다.
마침 순풍이 불어 항해가 순조롭게 이어졌다. 20여 척의 척후선이 앞장서고 대장선의 그 뒤를 따랐다. 그다음에는 각 장수가 거느린 선단이 뒤를 이었다. 총 500척의 대선단이지만 배의 크기가 작고 날렵해서 빠른 속도로 물살을 가르며 나아갔다.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이래 성장을 거듭해 온 해양 강국답게 뛰어난 해군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해가 서쪽 수평선으로 떨어질 무렵, 고구려의 대선단은 마침내 비사성 앞바다에 도착했다.
비사성에서는 등주에서 양곡을 운반해 온 장문호(張文虎)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한 연회가 열렸다. 장문호는 장문간의 종제로, 신임을 받고 있었다.
장문간은 종제에게 술을 따라 주며 격려했다.
“등주까지 다녀오느라 고생 많았다. 내일은 요하 하구로 떠나야 하니 오늘 밤만큼은 마음껏 즐기거라.”
임유관에서 요하에 이르는 보급로가 고구려의 유격대 때문에 막히자 해로를 통한 보급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장문호는 그 가운데도 중책을 맡고 있었다. 등주에서 양곡선을 인솔하여 요하 하구까지 간 후에 당군에게 군량을 전달하는 일이었다.
“저는 다시 항구로 돌아가야겠습니다. 배를 떠나 있으니 안심이 안 됩니다. 만에 하나 사고라도 생기면 큰일이니까요.”
종제가 불안해하자 장문간이 호탕하게 웃으며 놀렸다.
“이리도 고요한 밤에 무슨 일이 있겠느냐. 그리 걱정이 많아서야 무슨 큰일을 할 수 있겠느냐.”
장문간은 소심한 종제를 주저앉힌 후에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장문호는 종형의 강권을 마다하지 못하고 술을 들이켰다. 그는 한번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두주불사(斗酒不辭)였다. 술기운이 퍼지면서 보급선에 대한 걱정이 사라졌다.
장문간은 종제가 대작을 해 주자 기분이 좋아져 큰소리를 쳤다.
“내가 있으니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라.”
취기가 오른 장문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장단을 맞췄다. 연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자 장문간은 포로로 잡은 고구려 악공을 불러 거문고를 연주하게 했다. 그는 비사성에 들어와 처음 거문고 연주를 들은 이후로 그 가락에 빠져 있었다. 이제껏 들었던 칠현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소리가 깊고 매력이 있었다. 거문고 소리와 함께 연회의 흥취도 고조되어 갔다.
바다에 어둠이 내리자 고구려 함선들은 비사성 항구에 정박 중인 당군의 배들을 부채꼴로 포위했다. 배에 머물러 있던 당나라 군사들은 총관 장문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믐밤인지라 사방은 한 치 앞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어두웠다. 고구려의 전함은 소리 없이 포위망을 좁혀 갔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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