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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삼국지 [333] 아 고구려 ⑥
혜성이 동북방에 보이는 것은 고구려가 망할 징조다
임동주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5-22 06:30:20
 
 
서력 6666, 당 고종은 계필하력에게 군사를 주어 남생을 데려오게 했다. 계필하력은 현도성으로 나아가 군사를 주둔시킨 후 남생을 데리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고종은 남생에게 특진 요동 도독 겸 평양도 안무대사를 제수하고 현도군공으로 봉했다. 보장왕은 이에 맞서 남건에게 대막리지 겸 내외병마의 직을 내려 평양과 지방의 군사 업무를 통괄하게 했다.
 
그해 12, 당 고종은 이세적을 요동도행군 대총관 겸 안무대사로 봉하고 학처준(郝處俊)을 그의 부장으로 삼았다.
또한 방동선(龐同善)과 계필하력을 요동도행군 부총관 겸 안무대사로 삼고 전량사(轉糧使두의적(竇義積독고경운(獨孤卿雲곽대봉(郭待封) 등도 이세적의 지휘를 받게 했다. 이와 함께 하북 여러 주에서 거둔 조세를 군용으로 돌렸다.
이로써 제3차 고당 전쟁의 막이 올랐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재침한 것은 남생이 조국을 배신하고 당에 투항한 지 1년이 넘어서였다. 당나라는 거듭된 전쟁으로 피폐해진 상태였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최대 규모의 군사를 동원했다.
당나라 군대가 요하를 건넌 후 이세적이 뒤따르는 장수들을 보며 말했다.
신성은 고구려 서쪽 변경의 최고 요충지이다. 그곳을 먼저 빼앗지 않고는 다른 성을 공략하기 어렵다. 신성만은 반드시 함락시켜야 한다.”
대총관은 군사를 총동원해 신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반년이 넘게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됐다. 굳건히 방어하던 신성의 군민도 차츰 지쳐 갈 무렵 사부구(師夫仇)라는 자가 몰래 성문을 열어 당군을 불러들였다. 사부구는 당나라 출신으로 20여 년 전 고구려에 귀순했다. 그의 신상을 파악한 당군은 간자를 보내 은밀히 접근했다. 사부구는 당에 남아 있는 늙은 부모를 죽이겠다는 협박에 넘어가 어쩔 수 없이 성문을 열어야 했다. 이리하여 역사상 외적에게 함락된 적이 없던 신성은 어이없게 무너졌다.
이세적은 여세를 몰아 주위에 있는 성을 공격했다. 그리하여 인근 16개 성이 순식간에 점령당했다.
 
대막리지 남건은 평양에 있으면서 전서구를 통해 요동에 있는 성들과 긴밀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구전을 펼쳤다. 그는 유격전을 펼침으로써 당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남하를 막았다.
이 무렵 당나라 장군 방동선(龐同善)과 고간(高侃)이 신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남건은 군사를 보내 신성을 탈환하려 했지만 당장 설인귀(薛仁貴)가 배후에서 공격해 오는 바람에 패전의 고배를 마셨다.
신성에서 후퇴한 고구려군이 금산(金山)에 진을 치자 당장 고간이 쳐들어왔다. 고구려군은 고간의 군사를 섬멸하고 여세를 몰아 신성으로 진격했지만 설인귀의 기습으로 많은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설인귀는 남소ㆍ목저ㆍ창암 세 성을 차례로 함락하고 남생의 군대와 합류했다.
 
이세적은 적리도행군 총관 곽대봉(郭待封)에게 수군을 이끌고 평양으로 나아가게 하고 별장 풍사본(馮師本)을 보내 군량과 병장기를 공급하게 했다. 이를 파악한 남건은 해군을 동원해 풍사본의 선단을 패수구 앞바다에 수장시켰다. 이 때문에 곽대봉의 군사들은 굶주림에 허덕이게 됐다.
곽대봉은 자신들의 급박한 사정을 이세적에게 알리기 위해 서찰을 써서 보냈다. 혹여라도 고구려군이 중간에서 가로챌까 두려워 이합시(離合詩)로 적었다. 이합시는 한자의 자획을 떼어 의미를 나타내는 일종의 암호문이었다. 이를 받아든 대총관은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해서 부하 장수들에게 보였다. 하지만 누구도 그 뜻을 알지 못했다.
이세적은 답답한 마음에 버럭 화를 냈다.
화급을 다투는 상황에 이합시를 보내다니 정신 나간 자가 아니냐. 내 군법으로 엄히 다스리겠다.”
이때, 이세적 휘하의 미관말직(微官末職)인 원만경(元萬頃)이 나서서 그 뜻을 풀었다. 그 덕분에 군량과 병장기를 곽대봉에게 원활히 보낼 수 있었다.
이 일로 대총관의 신임을 얻은 원만경은 자신이 격문을 써서 당군의 위엄을 보이겠다고 청했다. 이세적은 그의 능력을 높이 사서 흔쾌히 허락했다.
원만경이 재기를 끌어모아 쓴 글은 고구려 진영에 전해졌다. 격문의 말미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不知守鴨綠之險 압록수의 험한 곳을 지킬 줄 모른다.
 
얼핏 보기에는 고구려군의 무능함을 질타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를 본 남건의 얼굴에는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저들이 우리에게 예의를 차리는데 어찌 답례가 없을쏘냐.”
남건은 조롱의 뜻을 담아 답장을 보냈다. 그 말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떡을 거저 준다는데 어찌 안 먹을쏘냐!
 
사자를 보낸 후 남건은 곧바로 군사를 옮겨 압록수 나루 인근에 포진했다. 이 때문에 당나라 군사들은 강을 건널 수 없었다. 으스대기 위해 보낸 격문이 당군의 진로를 알린 셈이었다. 뒤늦게 이를 안 고종은 대로하여 원만경을 멀리 영남(嶺南)으로 유배 보냈다.
 
서력 668년 정월, 이세적의 고구려 공략이 답보 상태에 빠지자 당 고종은 우상(右相) 유인궤(劉仁軌)를 요동도행군 부총관으로 임명하고 학처준과 김인문을 부장으로 삼아 요동으로 지원군을 보냈다.
이에 힘을 얻은 이세적은 2월에 고구려 북변의 요충인 부여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부여성이 함락되자 인근에 자리한 40여 개의 성도 차례로 무너졌다.
이때 시어사 가언충(賈言忠)이 요동을 순회하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고종은 그에게 당군의 근황을 물었다.
군중(軍中)의 상황은 어떠하냐?”
이번에야말로 선제의 한을 풀 수 있을 듯합니다. 지난날 고구려를 제압하지 못한 이유는 저들에게 빈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속담에 군대에 중매가 없으면 중도에서 돌아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골육상잔을 펼친 덕분에 남생이라는 길잡이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의 허실(虛實)을 손금 보듯이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 장수는 나라에 충성하고, 군사는 힘이 넘칩니다. 그렇기에 당당히 이길 거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단언컨대, 이번 걸음이 마지막 수고가 될 겁니다.”
거듭된 실패로 고구려 원정에 회의감을 품고 있던 고종에게는 힘이 되는 말이었다.
부여성이 함락되자 이에 당황한 남건은 5만 명의 군사를 급파하여 탈환에 나섰다. 하지만 설하수(薛賀水) 전투에서 참패하는 바람에 군사를 물릴 수밖에 없었다이세적은 승세를 타고 진군해 압록수 일대에 있는 대행성(大行城)과 욕이성(辱夷城)을 차례로 점령했다.
당군은 이미 남생을 통해 고구려군의 전력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었다. 고구려 사람으로서는 비분강개(悲憤慷慨)할 일이었다.
 
그해 4, 당나라에서 혜성(彗星)이 필성(畢星)과 묘성(昴星) 사이에 나타났다. 이를 본 허경종(許敬宗)이라는 신하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혜성이 동북방에 보이는 것은 고구려가 망할 징조다.”
계필하력은 압록수를 건너 평양성 앞에 다다랐다. 이어 욕이성을 함락시킨 이세적도 합류하여 성을 포위했다. 평양성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신세가 됐다.
고구려군은 한 달이 넘도록 평양성을 사수했다. 하지만 처절한 노력도 결국 물거품이 됐다. 싸울 의욕이 꺾인 보장왕은 남건 몰래 남산을 이세적에게 보내 투항의 뜻을 표했다. 그러고는 98명의 왕족과 대신을 거느리고 성 밖으로 나가 항복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대막리지 남건은 분통을 터뜨렸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남건은 항복할 바에는 차라리 죽겠다며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항전의 의지를 불살랐다. 그는 승려 신성에게 군사를 총괄하는 직책을 맡겨 방어에 전력을 쏟게 했다. 하지만 신성은 진작부터 적과 내통하고 있었다. 그는 소장(少將) 오사(烏沙오묘(饒苗) 등과 의논한 끝에 당군에 몰래 사람을 보내 내응하기로 했다.
닷새가 지난 후, 신성이 성문을 여니 기다리고 있던 당군이 함성을 지르며 평양성으로 들어왔다. 성이 함락되자 남건은 칼로 목을 찔러 죽으려 했다. 하지만 이를 보고 급히 달려온 당군에게 포박당해 포로 신세가 됐다.
이때가 서력 668926일이었다. 고구려는 동명성왕 이후 705년 만에 28대 보장왕을 마지막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해 10, 이세적이 보장왕을 비롯해 무려 20만 명의 고구려인을 끌고 장안에 입성했다. 당 고종은 보장왕 등을 먼저 소릉(昭陵)에 바치게 했다. 소릉은 당 태종과 그의 비 장손 황후가 묻힌 능으로 산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었다. 보장왕을 위시한 망국의 포로들은 당군을 지켜보는 가운데 태종의 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수모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도성의 거리로 끌려나간 고구려 포로들은 대오를 지어 길을 걸으며 개선가를 불렀다. 길가에서 이를 지켜보던 당나라 사람치고 비웃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 후 고종은 고구려 사람들을 대묘(大廟)에 바쳐 다시 한번 모욕감을 안겨 줬다.
 
그해 12, 당 고종은 함원전(含元殿)에서 보장왕을 비롯한 고구려 포로들을 대면했다. 그는 관대한 척 보장왕을 용서하고 사평태상백(司評太常伯) 원외동정(員外同正)으로 삼았다. 그 밖에 남산을 사재소경(司宰少卿), 승려 신성을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삼았고 남생을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에 임명했다. 오직 남건만은 검주(黔州)로 유배 보냈다.
이세적 이하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는 차등을 두어 관직과 상은 내렸다.
고종은 고구려 5·176·69만여 호를 9도독부·42·100현으로 나누고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통치했다. 우위위 대장군 설인귀가 검교안동도호(檢校安東都護)로서 군사 2만을 거느리고 평양에 주둔했다. 그 밖에 고구려인 중에 공이 있는 자를 뽑아 도독·자사·현령으로 삼고 당인을 도와 정사를 살피게 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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