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쓰는 역사 [25] 평민에게는 금지되었던 양반꽃, 능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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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비극을 담은 능소화 전설

스카이데일리 기자페이지 + 입력 2024-08-18 00:50:07

▲ 양반가에서 주로 자랐다는 이야기 때문인지 능소화는 기와집 돌담과 유난히 잘 어울려 보인다. 윤상구 사진작가

능소화. 이름에 포함된 ‘능’이라는 글자 때문인지, 다홍빛 꽃잎이 도톰한 입술을 닮아서인지 아니면 열대 지방을 연상케 하는 뜨거운 계절의 꽃이어서인지, 능소화를 보면 ‘관능적’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하지만 능소화(凌霄花) 한자는 전혀 다른 뜻을 담고 있다.

능(凌)은 ‘침범하다·깔보다·오르다’ 등을 의미하고, 소(霄)는 하늘을 나타낸다. 그래서 ‘하늘을 우습게 보는 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보다는 덩굴이 하늘을 향해 뻗어 오르는 특성 때문에 붙은 이름인 듯하다.

꽃이 질 때 송이째 떨어지는 ‘양반꽃’

나팔처럼 생긴 능소화는 꽃이 질 때 송이째 떨어진다. 그 모습이 품위 있게 보여서인지 옛 선비들은 능소화를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여겼고 ‘양반꽃’이라 부르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는 평민의 집에서 능소화 키우는 것을 금지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로 여러 가지 설이 거론된다.

과거 시험 장원 급제자에게 임금이 내리는 어사화에 쓰였기 때문이라는 설은 그나마 그럴듯하다. 꽃이 품은 독으로부터 평민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는 설도 있지만 역시 설득력은 없다. 능소화를 쳐다보다 꽃잎에서 떨어진 이슬에 실명했다거나 여자가 능소화 향기를 맡으면 불임이 된다는 괴담도 평민들을 능소화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덩굴 식물인 능소화는 대개 담장이나 벽을 타고 올라 꽃을 피운다. 양반가에서 주로 자랐다는 이야기 때문인지 능소화는 기와집 돌담과 유난히 잘 어울려 보인다. 그런데 강릉 선교장 열화당에는 이례적으로 능소화가 마당 한가운데서 자라고 있다. 그 독특한 능소화에는 듣는 사람을 감동케 하는 사연이 있다.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의 11세손이 조성한 선교장은 한때 금강산 등 강원도 명승지를 찾은 유람객들에게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20여 년 전, 선교장에서 신세 진 유람객 중에 충남 서산 출신 선비가 있었다. 선교장에서 지내는 동안 그 선비는 자기 집 능소화를 자랑하며 다음에 들를 때 가지고 오겠다고 약속했다. 효령대군의 후손 이근우가 선교장 주인이던 시절이었다.

마당 한가운데서 빛나는 열화당 능소화

▲ 옛 선비들은 능소화를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여겼다. 윤상구 사진작가

교통이 편한 요즘도 그런 약속의 이행을 기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데 그 약속 자체도 까맣게 잊고 있던 이근우 앞에 어느 날 낯선 사내 한 명이 나타났다. 서산 선비의 하인이라는 그 사내는 등짐에서 능소화를 뿌리째 조심스럽게 꺼내놓았다. 그는 자신의 주인이 세상을 뜨면서 능소화를 선교장에 전해 달라고 당부했다는 사연을 전했다.

서산에서 강릉까지 먼 길을 찾아온 충직한 하인 이야기도 감동적이다. 산 넘고 물 건너 강릉으로 오는 몇 날 며칠 동안 행여 능소화 뿌리가 마를까 봐 낮에는 개울가에서 이끼로 뿌리를 덮어놓고 쉬었고 햇빛이 없는 야간에만 이동했다. 이런 세심한 배려마저 선비가 생전에 남긴 당부였다고 했다. 이근우는 그 두 사람의 신의와 정성을 기리는 의미에서 마당 한가운데 능소화를 심었다고 한다.

능소화에 관련된 슬픈 전설도 있다. 옛날 소화라는 궁녀가 후궁이 되었지만 사랑이 식은 임금은 더 이상 소화를 찾지 않았다. 임금을 기다리던 소화는 상사병을 앓다 죽었고 자신을 담장 곁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그 후 소화가 묻힌 담장 곁에 꽃이 피어났는데 그 꽃이 능소화라는 이야기이다.

비극적 결말을 암시한 드라마 속 능소화

조선 22대 임금 정조와 후궁 의빈 성씨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도 능소화는 비극적 결말을 암시하는 설정으로 등장했다. 의빈 성씨는 아들이 세자(문효세자) 책봉을 받았으니 임금의 어머니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1786년 3세의 문효세자가 죽었고 여섯 달 후 의빈도 세상을 떠났다.

정조는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의빈을 애도하며 묘지명을 손수 썼는데 그 내용에 자신이 의빈에게 두 번이나 거절당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담았다.

“처음 승은을 내렸을 때 내전(효의왕후)이 아직 귀한 아이를 낳아 기르지 못했다며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이에 감히 명을 따를 수 없다며 죽음을 맹세했다. 나는 마음을 느끼고 더는 다그치지 못했다. 15년 뒤에 널리 후궁을 간택하고 다시 명을 내렸으나 빈은 또 거절했다. 빈의 노비를 꾸짖고 벌을 내린 뒤에 비로소 내 명을 받들어 당석(차례가 돌아온 날 잠자리를 같이 함)했다.”

조선 시대 양반들은 능소화 꽃 감상을 독점하려 했다.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도 사랑하지만 임금을 독차지하지 못하는 슬픔에 대해 여러 번 언급되었다. 의빈이 정조를 거절한 것은 그 슬픈 운명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발버둥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완전한 독차지, 영원한 독점이 가능할까? 독차지하지 못하는 상황 자체가 아니라 독차지하고 싶다는 욕심이 인간을 괴롭게 하는 것 아닐까?

능소화가 만발하여 더욱 찬란했던 여름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아무리 더워도 여름은 가고 계절은 바뀌며 그 과정에 세월이 흐르고 누구든 머지않아 사멸의 길을 걷는다. 이런 자명한 이치 안에서 보면 우리를 괴롭히는 그 다양한 욕심들은 얼마나 무의미한가.

[글 황인희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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