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162] 나 바람둥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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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랑을 모른 체해 주세요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8-28 06:30:10

“당신은 아내를 사랑하고 있어요.”

하운이 말했다.

“함께 밤을 보낸 여자는 말하지 않아도 남자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게 되지요.”

하운이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두 손을 깍지 끼워 턱을 받쳤다. 그리고 냉정하게 내 눈을 바라보았다.

“당신을, 사랑해요.”

나는 필사적으로, 말했다. 하운은 놀랍지도 않다는 듯, 조금도 감동하지 않은, 여전히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빤히 지켜보았다.

“난 불행하게도 삶이란 원래 비어 있는 것이고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요. 결국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지요. 내 삶은 오랫동안 허무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렸으니까요. 나, 바람둥이 아니에요.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순정하고 점잖으신 분들이었고 난 그분들의 아들인걸요. 그러나 욕망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어요. 대신 절제를 강요당하며 자랐지요. 그래서 사랑을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 알지 못해요. 하운 씨, 내가 부족한 거 알아요. 그러나 진심으로 당신을 존중하고 아끼고. 그리고 사랑해요. 하지만 이해해 줘요. 오늘은 너무 혼란스러워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오늘은 제발 모른 체해 주세요.”

내가 테이블 위로 손을 뻗었다. 나는 아직 내 편이 절실히 필요했다.

“내일은 달라질 거예요.”

그녀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인 양 재빨리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는 속지 않았다. 사형 집행을 유예하는 사형수처럼, 그래도 내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일요일 오후, 결혼식장은 혼잡했다. 엘리베이터와 계단으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르내렸다. 3층에 도착했을 때 홀 안쪽에서 커다란 박수 소리가 들렸다. 신랑 입장을 반기는 하객들의 축하였다.

하운과 식당을 나온 뒤 나는 템플 어비수스에 들어가 한참이나 시간을 보냈다. 아무리 오래 머물러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온종일 그곳에서 머물다 죽는다 해도 황홀하게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한껏 늦장을 피운 탓에 하운이 웨딩홀 앞에 내려 주었는데도 식전에 유리를 잠깐 만나 인사만 하고 나오려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유리는 벌써 신부 입장을 기다리며 버진 로드 앞에 서 있었다. 신랑 신부 행진 뒤에 얼굴이라도 잠깐 보려면 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어쩌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일지도 모르는데 그중 몇 시간을 유리에게 할애한다는 게 억울하기만 했다. 방명록에 이름이나 쓰고 갈까 갈등했지만 그래도 유리와의 약속이 마음에 걸렸다.

거의 모든 결혼식에서 들을 수 있는 익숙한 피아노 연주가 시작되었다.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 중에서 ‘혼례의 합창’이었다. ‘로엔그린’은 ‘백조의 왕자’ 이야기와 첫날밤에 에로스의 정체를 알고자 했던 프시케의 비극을 섞어 놓은 것 같은, 바그너의 오페라였다. 모함과 위기에 빠진 여주인공 엘자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로엔그린과 결혼한다. 신랑은 절대 자신의 출신과 이름을 물어보지 말라고 다짐을 했지만, 당신은 누구세요? 신부는 첫날밤에 묻고 만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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