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17] 오월의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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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1-02 06:30:28

오월의 장미는 없었다. 4월 중간고사를 앞두고 시작된 시위는 학기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처음 들이켰던 담배 연기보다 천 배는 더 따가운 최루탄 가스가 매일 콧구멍과 목구멍을 겁탈했다. 데모하지 않는 학생들은 시위가 벌어질 시간쯤이면 수업을 제치고 학교를 빠져나갔다. 대학가 5월은 시위의 전성시대였다. 다른 때보다 명분이 명료했다. ‘광주사태 책임자 전두환은 물러가라!’ 장경관 오월계단 앞에 광주 유혈 사태 사진이 전시됐다. 학생들은 손이 뒤로 묶인 채 진압군 앞에 무릎 꿇은 시민들의 사진을 보았다.

사진은 끔찍했고 전쟁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장한 계엄군들에 의해 질질 끌려가는 시민들, 계엄군의 총알받이가 된 도청 건물, 총을 든 시민군에게 물 주전자를 가져다주는 아주머니, 시민의 멱살을 잡고 방망이를 들고 있는 계엄군, 길바닥에서 홀로 울고 있는 아이, 피가 흥건한 도로. 사진엔 없지만 임산부 배를 가르고 아기를 꺼냈다는 내용과 처녀의 유방을 칼로 도려냈다는 내용의 대자보가 사진 옆에 게시됐다. 뉴스에서는 시위 학생들을 용공 분자로 몰아갔다.

권력자들은 그들의 선전 선동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언론을 이용했다. 용공 분자들에 의한 유언비어에 속지 말라는 메시지를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방법으로 송출했다. 암튼 문제야 문제. 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매일 돌팔매질이나 하고. 지긋지긋한 빨갱이! 언론·방송 등 대중 매체가 묘사한 현실은 실재하는 현실과 다른 데도 그들의 인식은 대중 매체가 보여 주는 현실에 따라 구성되고 있음을 느꼈다. 매체는 집단의식 속에 이념을 주입하기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었다.

4·19와 5·18은 대학가에선 명절이나 다름없었다. 흩어진 가족이 차례 지내러 오듯 시위 학생들이 타지에서 모여들었다. 4·19보다 5·18이 더 격렬했다. 독재 타도·민주항쟁 기념행사 후엔 어김없이 전투가 시작됐다. 학생들은 준비한 화염병과 돌멩이를 들었다. 그 많은 화염병은 어디서 나온 건지. 서울 시내에서 돌멩이 구하려면 학교 내 보도블럭을 깨거나 외부에서 반입해야 했지만 오산에서 돌멩이 구하는 건 누워서 떡 먹기였다. 학교 건물 공사 중이라 벽돌이 쌓여 있었고 뒷산으로 가면 돌 천지였다.

학교 앞도 포장이 안 된 도로라 돌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전투 목표는 전두환 군부정권 타도인데 화염병과 돌멩이 투척 대상은 전경들이었다. 벽돌을 조각내 깨서 던지기는 했지만 단단하고 무거워서 벽돌은 총알 이상의 위력을 발휘했다. 제대로 맞으면 크게 다치기 십상이었다. 전경들이 정문 앞까지 밀고 들어오면 시위 학생들은 논밭으로 도망갔고 매복해 있던 사복 경찰들이 메뚜기 잡으러 다니듯 뒤쫓아갔다. 사실, 오산 캠퍼스의 전투 화력은 그다지 위협적이진 않았다.

멀리서 보면 학교 지형은 목항아리 같았다. 목 부근에서 시위하면 전경들은 항아리 안으로 시위대를 몰아넣었다. 너희는 독 안에 든 쥐야. 튀어 봤자 벼룩이지 하는 그런. 잡힌 학생들은 목덜미를 잡혀 질질 끌려갔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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