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18] 파쇼와 민주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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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1-03 06:30:09

철학개론 시간이었다. 최루 분말을 뒤집어쓴 학생 한 명이 수업 중인 교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박철규였다. 동기인데 구국의 신념으로 이 학교에 들어왔고 입학하자마자 운동권 투사가 되겠다고 신입생 환영회 때 맹세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교수가 있는데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릴 질렀다.

“학우들이여 다 같이 시위에 동참하여 군부독재를 끌어내자, 지금 저 밖에는 교활한 군부독재 탄압에 동지들이 피 흘리며 쓰러져 있다! 함께 나가서 싸우자, 함께 민주를 지키자!”

교수는 동참하려면 하라는 식으로 사태를 말없이 지켜봤다. 한낱 신입생에게 한마디 꾸중도 못 할 만큼 무기력한 태도에서 나약한 엘리트의 한계가 보였다. 상아탑 패권을 운동권 학생이 쥐고 있다는 증거였다. 모두가 마치 죄인이 되어 가는 분위기에서 승연이 벌떡 일어났다.

“나가서 싸울 권리도, 수업할 권리도 민주야. 강제적으로 나가자고 하면 그게 파쇼지 민주냐?”

학생들이 일제히 승연을 바라봤다. 박수까진 아니어도 응원하는 눈빛은 확실했다. 오, 맞다. 민주란 그런 거지. 우리에겐 데모 안 할 권리가, 공부할 권리가 있다고. 승연의 당당한 말에 박철규는 대꾸 못 하고 찌그러졌다. 수업이 시작되어도, 수업 시간에 들어오지 않는 학생은 박철규뿐이 아니었다. 그들은 대학교에 적만 두고 시위 이력 만드는 게 목적인 것처럼 보였다. 3월 한 달만 빼면, 정확히는 3주 정도만 봄날이었다. 개나리·진달래로 채웠어야 할 봄 항아리에선 매운 최루가스만 발효되어 갔다.

박철규가 강의실 문을 박차고 들어와 시위에 동참하자 외치고 간 이야기, 승연이 박철규에 반발한 이야기는 학생들 사이에서 금세 퍼졌다. 학생 비율로 따지면 비운동권이 운동권보다 훨씬 많았다. 그래도 총학생회는 운동권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동기생 박철규는 새내기 중 가장 열렬한 투사였다. 한 번도 수업에 들어온 날이 없었다. 승연은 박철규를 볼 때마다 생각했다.

‘쟤는 이제 고작 대학 1학년 1학기도 지나지 않았는데 전두환과 무슨 원수가 지고 한이 많아 저렇게 치열하게 돌멩이를 던질까.’

동기보다 두 살이나 많은 박철규의 스토리는 짠했다. 부친이 전라남도 순천에서 택시 운전을 했는데 비번인 날 술을 잔뜩 마시고 무단횡단하다 비명횡사했다는 것이다. 모친이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 갔고 남자 형제 셋은 고등학교 졸업 이후 뿔뿔이 흩어져 살았다. 박철규는 대학에 가려고 2년 동안 안 해 본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일했고 돈을 모아 대학 등록금을 마련했다.

박철규는 이 학교에 들어온 이유로 단 하나를 꼽았다. 1980년 4월 김대중의 한신대 연설이었다. 당시 수유리 캠퍼스에 김대중 연설을 듣기 위해 몰려든 군중이 1만여 명이었고 이것은 김대중의 장외 정치 투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서슬 퍼렇던 군사독재 시절, 모든 대학이 학생의 목소리를 외면한 채 독재의 압박에 몸 사릴 때, 유일하게 지성의 목소리를 낸 유일한 곳이라는 게 이 대학의 자부심이었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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