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전기차 시장의 성장기를 상징하던 한국 배터리 업체와 글로벌 완성차 기업 간 동맹 구도가 흔들리고 있다. 단순히 속도를 조절하는 단계를 넘어 미국과 유럽의 완성차 업체들이 막대한 자산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한국 파트너와의 합작법인에서 잇따라 손을 떼고 있다. 전기차 시장의 미래 수익성에 대한 완성차 업계의 냉혹한 투표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100달러에 넘긴 1조 원의 가치…
가장 상징적인 사례는 LG에너지솔루션과 스텔란티스의 캐나다 합작법인 ‘넥스트스타 에너지’다. 스텔란티스는 장부가치 약1조 4000억 원에 달하는 지분 49%를 단돈 100달러에 LG측에 매각했다. 사실상 지분을 포기하는 방식의 정리로, 완성차 업체가 배터리 생산 투자 리스크를 더 이상 공동으로 부담하지 않겠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이 같은 흐름은 업계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삼성SDI와 스텔란티스의 미국 합작법인인 ‘스타플러스 에너지’ 역시 지분 재편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으며, SK온은 지난해 말 포드와의 합작 체제를 종료하고 공장별 자산 분할에 들어갔다. 업계에서는 보조금 축소와 수요 둔화가 맞물리면서 완성차 업체들이 현금흐름 방어에 나선 결과로 보고 있다.
‘캐즘’을 넘어선 ‘정책의 벽’
전환의 배경에는 정책 변수도 자리하고 있다. 지난해 9월 미국의 전기차 소비자 보조금이 폐지된 이후 가격 부담이 커지면서 수요 증가세가 둔화됐고, 완성차 업체들은 생산 및 투자 계획을 보수적으로 조정하고 있다. 전기차 비중 확대 전략 대신 하이브리드와 내연기관 모델 비중을 병행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완성차 업체들이 발을 빼면서 발생한 수조 원대의 손해와 공장 운영 책임은 고스란히 한국 배터리 기업들의 몫이 됐다.
ESS로의 대이동, ‘탈출구’인가 ‘임시방편’인가?
국내 배터리 업체들은 대응 전략으로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장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확산으로 전력 수요가 폭증하면서 ESS가 새로운 돌파구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국내 배터리 업체들은 대응 전략으로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장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90GWh), SK온(20GWh), 삼성SDI(매출 50% 확대) 등 배터리 3사는 공격적인 ESS 수주 목표를 내걸었다. 합작 재편 과정에서 확보한 북미 생산 거점 역시 ESS 생산 기지로 활용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다만 ESS가 전기차 배터리 수요 공백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신중론이 적지 않다. ESS 시장은 완성차 업체와의 장기 공급 계약 기반인 전기차 배터리와 달리 프로젝트별 경쟁 입찰 방식이 일반적이어서 가격 변동성과 마진 압박이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구조적 한계: LFP의 늪과 마진 압박
제품 구조도 차이가 있다. ESS용 배터리는 고성능 하이니켈 제품보다 가격 경쟁력이 높은 리튬인산철(LFP) 배터리 비중이 높다. 이미 중국 업체들이 주도권을 확보한 분야로, 한국 기업들은 가격 경쟁과 수익성 관리라는 이중 과제를 안고 있다.
전력 저장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지만, 수백만 대 차량에 탑재되는 전기차 배터리 시장의 규모와 수익성을 그대로 대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결국 한국 배터리 업계는 합작 중심의 성장 모델에서 벗어나, ESS를 포함한 독자 수익 구조를 구축해야 하는 전환점에 서 있다는 평가다. 북미 전기차 시장의 속도 조절 국면이 길어질수록, 생산 거점 활용 전략과 제품 포트폴리오 다변화의 성패가 실적을 좌우할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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