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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인간의 질서<39>]-그로테스크 노트 : 사냥하는 토끼(①-2)
절대성 품은 불완전 네트워크 완전하면 멸망기운
혼돈 평정하는 작위적 혼돈에 무질서 확산…차별에 대한 저마다의 위기감이 부의 원천
알앤알 필진페이지 + 입력 2018-08-23 18:41:24
공포에 마주할 때 열리는 수많은 기회의 문
 
▲ ⓒ스카이데일리
[전편에 이어] “토끼는 0의 좌표에서 스스로 있음을 드러내고자 했다. 있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지가 개입되는 순간 불완전한 시공간이 만들어졌다. 토끼는 0의 좌표에서 굳이 완전을 지향하지 않아도 됐지만 완전해 지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불완전한 자신의 환경을 키웠다. 0의 좌표를 벗어난 자연과 인간은 완벽할 수 없는 자신의 한계 외에도 불완전한 외계 포스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 같은 운동계 좌표에서 완전해 지려고 할 때 불안, 공포, 두려움 등이 생기고 있었다. 운동계로 나온 토끼는 사냥하는 맹수가 절대성에 가깝게 다가왔다. 토끼의 불안은 가중됐지만 맹수가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으로 간주됐다. 맹수를 향해 갈수록 토끼의 불완전한 모습도 커져갔다. 자신의 힘만으로 절대 완전을 지향할 수 없음에도 토끼는 정글의 맹수가 되고자 사냥을 했다. 풀을 뜯지 않고 육식에 나서면서 생태계를 교란시켰다. 토끼의 맹수성은 불완전의 극치였다. 정글의 모든 동물들이 원하지도 않고 토끼 자신도 원하지 않는 모습이다. 헛된 꿈일수록 확연한 미래 같지만 가상의 현실이다. 꿈을 깨고 보니 0의 좌표에서 벗어나지 않았는데 발버둥치는 토끼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0의 좌표는 완벽하다. 어디를 가도 시간이 같다. 방향도 없다. 시공간이 존재하지만 없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하지만 없지는 않은 없음이다. 숫자의 0이 갖는 의미다. 0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없는 것으로 계산된다. 0의 좌표에 있다는 것은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교차점이라는 있음의 의미다. 0에 그 어떤 숫자를 더하고 빼기를 해도 연산한 숫자 이상으로 늘어나지 않고 줄지 않는다. 하지만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구분을 정확히 해 주면서 존재한다.
 
또 곱하기와 나누기를 하면 천문학적으로 큰 수라도 0에 흡수돼 사라진다. 가로줄의 사과가 아무리 많아도 세로줄의 사과가 0개이면 없는 사과들이다. 없지만 있거나 없어야 있는 0의 묘한 위상이다. 0의 발견은 초정밀 자연의 원리를 이해하는 유와 무의 경계선인 시작점을 찾아낸 위대한 사건이었다. 0이 현상계에서 시간을 시작하는 단위로 사용되듯이 자연의 원리도 알게 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됐다. 0의 발견에 기초한 수학은 자연을 향한 거대한 망원경과 극미의 현미경을 동시에 선사받은 것이었다. 이는 자연에 절대성이 본유하고 있을 것이라는 본질을 확신하는 계기도 됐다.
 
0의 좌표는 시간의 균질성이자 공간의 등방성이 얽혀 있는 구조다.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 또는 어디를 찍어도 시작이고 끝인 시간의 균질성에 중심과 변방이 없거나 모두가 중심이고 변방인 공간의 등방성이 하나의 에너지 장으로 얼개를 구성하고 있는 모습이다. 극도로 고요한 시공간과 요동치는 시공간이 하나의 원리 안에 있지만 0의 좌표가 그 경계선을 품고 있다.
 
0은 그래서 이상적 조화의 좌표다. 만물이 탄생하기 위한 자궁과도 같다. 시간이 없고 균질하며 공간이 없고 등방이기 때문에 안 보이는 시공간이 0의 좌표로 보이기를 반복한다. 0의 좌표에서 가속운동(에너지)이 발생하면 가려졌던 시공간이 드러난다. 가속운동은 힘의 매개입자와 질량을 갖는 물질을 모두 포괄한다. 0의 좌표에서 보이는 물질과 보이지 않는 힘의 운동성은 생로병사를 좌우한다. 자연계 모든 생명들은 운동성을 통해 시공간이 탄생하기 전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 완벽한 조화의 모습에서 불완전한 인간도 마찬가지다. 그 불완전이 역설적으로 자연과 인간의 원류 에너지가 됐다. 있음이라는 운동 속에 뒤틀려진 시공간은 멋들어진 자연을 선물했다.
 
물질이나 에너지가 시공간의 점유 또는 이동을 통해 있음의 성질이 발현된다는 것은 불완전의 연출이다. 조화에 가까울수록 자연은 아름다움을 상실하는 역설의 조화를 따른다. 대칭의 기막힌 역동성이 비대칭의 자연현상을 드러내면서 미학을 연출시킨다. 추상성이 현대 미술의 상징인 것처럼 부조화, 차별, 비대칭, 혼돈 등은 탄생을 알리고 생명을 현존재하게 하는 생명의 질서다.
 
생명이 자연의 기본 얼개를 구성하고 있는 만큼 생명들의 갈등, 대립, 전쟁 등의 부조화는 당연한 질서다. 나아가 부조리나 불합리 또한 정의롭지 못하다고 해도 정의가 아닌 것으로 절대적 규정을 짓지 못한다. 아무것도 완벽하지 않고 또한 완벽하지 않은 것이 없는 카오스적 질서다. 정글의 질서는 바로 불완전의 자연성을 품은 절대적 완전성 네트워크 시스템으로 존재한다. 약육강식의 불평등과 부조화는 곧 자연의 완전한 질서이자 정의로 기능한다. 이를 깨고자 할 경우 절대성이 품은 불완전의 네트워크들이 흔들리면서 생명의 질서에 멸의 기운을 몰고 온다. 맹수가 되고자 하는 토끼의 사냥에 대한 꿈은 바로 스스로 멸을 자초하는 운동성이다.
 
질서는 혼돈을 필연적으로 머금지만 그 혼돈을 평정하려는 작위적 혼돈은 머금지 않는다. 인간 사회에서 혼돈의 대명사는 차별이고 차별보다 더한 작위적 혼돈은 인위적 평정이다. 차별의 질서를 인위적으로 평정하려 하면 절대적 질서에 높은 장막을 치는 행위다. 영원히 절대성을 지향할 수 없는 곳에 스스로 장벽을 치고 자신만의 질서에 만족하며 오만해진다. 오만은 삐뚤어진 권력을 낳아 자연을 피로 물들게 하기도 한다. 인간 사회에서 무차별의 유토피아가 얼마나 많은 무고한 목숨을 유린해 왔는가를 보면 누구나 오금이 저린다. 절대성의 정글 법을 작위적 법으로 대체하는 부메랑은 자연의 역습이다. 따라서 차별이 질서를 머금는다면 비인간적인 사회의 어두운 단상을 어둡다고 단정하지 못한다. 오히려 차별이 만들어 내는 시스템이 만인들에게 이로운 결과를 낳는다.
 
크게 보기=이미지 클릭 [그래픽=고윤석] ⓒ스카이데일리
 
자본주의와 자유시장의 질서는 풀을 뜯는 토기의 질서다. 토끼는 맹수의 본성이 없다. 맹수는 토끼를 미워하지 않고 토끼 또한 맹수를 미워하지 않는 먹이사슬 속 평화 본성이다. 토끼는 그 속에서 생존게임을 벌이며 최선의 삶을 유지한다. 토끼가 맹수보다 천대받을 일이 없고 토끼가 맹수를 동경할 일이 없다. 이를 인위적으로 바꾸기 위한 토끼의 사냥에 대한 꿈은 결국 아무도 원하지 않는 홀로그램이다. 마치 눈앞에 존재하는 듯한 토끼의 맹수에 대한 꿈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다. 질서자를 자임하는 일단의 토끼들이 정글의 평화를 부르짖으며 먹이사슬을 없애고자 할 경우 배고픈 동물들이 무한히 나온다. 먹이사슬이 무너진 정글의 법은 지독한 가난과 배고픔이다. 토끼의 잘못된 꿈이 이뤄지면 0의 좌표까지 흔들리고 만다. 절대성이 깃든 자연의 본성에 마의 기운이 뻗치면 멸종에 필요한 사특한 에너지가 강력하게 분출된다.
 
자연은 언젠가 자연적으로 소멸될 운명을 갖고 있다. 하지만 소멸은 다시 탄생하는 시작을 알린다. 생명의 원천이자 고향인 별들의 탄생과 죽음이 이 원리를 충실히 따른다. 땅의 원리는 보다 근본적인 사이클에 의해 지배를 받는 자연스러움이 있다. 땅의 불완전성은 0의 좌표에서 멀지 않다는 것이다. 언제든 완벽해질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곳이 대지의 축복이다. 운동성을 통해 드러난 불완전성이 마치 사탄인 냥 하는 유혹이 진짜 사탄의 특성이다. 그들의 집요한 유혹은 삶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경쟁을 통한 삶의 가치가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되는 만큼 차별은 언제나 척결대상이 된다. 일단의 토끼가 사냥을 꿈꾸는 이유다. 토끼의 사냥 꿈은 하룻밤도 못 가는 몽상이다. 다만 몽상은 지속되는 과정에서 더 큰 몽상이 나오고 그려진다.
 
초식동물 토끼가 맹수 못지않은 생명의 환희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얼마든지 많다. 생존경쟁이 그 토양이다. 수많은 경쟁은 곧 차별이다. 이 차별성을 심화시킬 때 자본시장의 부가가치 총량이 증가하는 현상도 발생한다. 치열한 경쟁을 유발하며 이타성의 토양을 닦는 차별에 대한 저마다의 위기감은 결국 자신들에게 훨씬 많은 이익을 가져다준다. 자본시장의 대부분 사람들은 이 원리를 알고 따른다. 산업자본을 이끄는 자본가들은 이 구조를 너무 잘 이해하고 있다.
 
자본가들은 자신이 받는 차별의 공포조차 기회로 받아들이고 배움의 과정으로 여긴다. 이들에게 차별은 수많은 성공의 문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차별이 커질수록 카오스적 질서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는다. 이들은 가속운동을 쓰면서 수많은 기회의 문을 연다. 많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서 실패를 거듭하지만 그 노력만이 차별의 특혜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 본성을 버리지 않으면서 차별의 평등감을 갖고 동시에 차별을 만들어 끝내 성공의 사다리를 올라간다. 이들에게 영원한 차별은 없다. 차별은 영원하지만 자신의 차별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자신은 무차별의 세상을 만들지만 결국 스스로 정글의 질서를 주관하는 강력한 포스에 오른다.
 
토끼가 사냥을 하고자 하는 자만과 오만은 대개 차별의 불평등에 대한 주체적 해결의지로 나오지만 절대적 질서에 반하는 착각이다. 카오스적 질서를 바로잡겠다는 오만이 억지춘양의 권력지향형 행보다. 토끼의 과대망상은 일을 하지 않거나 게을리 하면서 사냥을 하고자 하는데 있다. 나아가 일을 할 줄 모르는 무능력한 토끼가 질서자로 군림하고자 하는 욕망에까지 이르면 과대망상이다. 이들 토끼의 꿈은 늘 정의로운 듯 보이지만 매번 정의롭지 않게 끝나는 경우가 아주 빈번하다. 무차별 질서를 추구하는 속에서 차별을 더 많이 만들어 내면서 용서가 없는 무소불위 권력만을 잉태시키기 때문이다. 자본시장에서 이런 정의들이 무수히 명멸하기를 반복한다.
 
무능력한 토끼의 정의는 포장되고 가공되면서 겉모습이 호화롭다. 마치 정의의 사도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정작 토끼의 정의는 생명의 위협을 벗어나기 어렵게 만든다. 스스로 올가미를 씌우는 토끼의 행동은 예정된 수순이다. 정글에서 정의는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다. 수많은 이율배반의 정의들이 여기저기 솟구치기 때문에 시공간의 상황에 따라 같은 정의조차 수없이 분기된다. 사냥하는 토끼가 자신의 힘만을 믿고 사실상 무한히 존재하는 정의의 칼을 잡겠다는 것은 이기심의 극치인 것이다. 이타성으로 위장했기에 이 이기심은 더욱더 나쁘다. 이는 정의로 잘못 그려진 무한한 그림을 앞에 놓고 선택을 하지 않아야 빛을 발한다는 의미와 같다. 풀을 뜯을 용기를 지켜갈 때 사냥하는 토끼 이상의 많은 정의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 정의는 보여주기식 이타성이 아니라 이기적 본성의 요동치는 질서 미학이다. 토끼가 맹수의 정의를 굳이 구분하지 않고 이타적 본성을 유지할 때 정의는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생명체들의 양심의 소리라는 것을 안다.
 
개별자들 마음에 울리는 생명의 본성들이 정의롭다. 이를 수렴할 때 자유시장의 많은 사람들이 부가가치를 만들어 내고 상호 도움을 주면서 이타적 삶을 자연스럽게 살아 더 많은 부자가 탄생한다. 부는 외견상 부자연스럽고 추해 보이지만 카오스적 질서의 결과물로 매번 드러난다. 부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갖고 맹목적으로 부를 혐오한다면 결코 부의 길을 개척하지 못한다.
 
토끼가 사냥을 해서라도 부의 평준화를 추구하는 것이 정의라면 그 정의를 악용한 불의가 반드시 조응한다. 오히려 시장의 질서를 외면할 때 겉과 속이 다른 허접한 정의들이 맹위를 떨친다. 그만큼 자연스럽지 못한 정의감은 국가와 사회를 위태롭게 한다. 정의를 강하게 규정할수록 그것을 받아들이는 선한 자들보다 그것을 통해 자기이득을 취하려는 이단아들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이들을 통제하기가 어렵다. 외견상 정의의 편에 동기화 된 듯 보이는 실상의 내막을 보면 상황별로 무엇이 최선의 정의인지 판단을 유보해야 하는 상황이 매번 닥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토끼에게 자신의 포식자인 맹수는 공포의 대상이지만 육식이 가능하다는 판단에 이르고 사냥까지 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공포는 자만으로 바뀌고 자만은 오만으로 커지면서 스스로 올가미를 씌운다. 그 상태에서도 도덕률의 가치상승 지향성을 가져가면서 정의를 완성하려 하지만 그럴수록 군중들 속에 잇는 악의 기운들까지 스멀스멀 나오게 한다. 초정밀의 다른 말이자 같은 뜻인 냉혹함이 떠나버린 황량한 땅에서 휴머니즘 권력의 깃발을 높인다고 따듯해지지 않는다. 치열한 냉혹함일수록 영양분이 풍부한 과실이 만들어진다. 경쟁적 결실은 무엇이든 만들어 내는 절대적 추상성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기에 무엇이든 가능한 추상성의 무한 에너지가 부와 부자정신에 녹아들어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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