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태복음 5 : 8>
“내 몸에는 민주당의 피가 흐른다” “국회의장이 되어도 민주당의 일원임을 잊지 않겠다” “국회의장이 되면 윤석열정부를 제대로 견제하겠다.”
국회의장 후보로 나온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져 나온 소리다. 물론 일련의 이 같은 행보가 당내 경선을 의식한 전략일수도 있겠지만, 경악을 금할 수 없다. 국회의장 자리가 민주당 당의장을 뽑는 자리인가.
국회의장은 당파를 초월해 여야를 조율하고 타협을 도출하는 중책 중 중책이다. 의장이 되는 순간 당적을 정리하고 무소속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자리의 의미와 무게를 민주당 최고참 의원임을 자처하는 의장 후보들이 철저히 짓밟았다.
제21대 후반기 국회의장직에 출마한 후보자들의 발언이 걱정스럽고 국민을 불안하게 한다. 비전 제시가 아니라 아예 집권 여당에 선전포고를 하는 기분이 든다. “검찰공화국의 엄혹한 시대에 맞서 민주주의와 국민·민주당을 지킬 의장이 필요하다. 불통과 독선의…. 윤석열정부의 불도저식 국정 운영을 막아내는 국회를 만들고 싶다. 제 몸에는 민주당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래야만 정권을 되찾아 올 수 있다”고 약속이나 한 듯 앵무새처럼 입을 모았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당파적인 국회의장 출사표가 언제 있었는가. 어찌하여 이런 비상식적인 분위기가 연출되었는지 의아하기만 하다.
국회의장은 법적·규범적으로 여야의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립성을 지켜야 한다. 국회법 20조의 2는 의장으로 당선된 다음날부터 임기를 마칠 때까지 당적을 가질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입법부가 삼권분립의 한 축으로 견제와 균형을 통해 민주주의를 지탱하듯 의장은 다수당과 소수당(들)이 대화를 통해 견제와 균형을 이룰 수 있는 규범적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의장은 동물·식물 국회가 아니라 여야 협력의 국회로 이끄는 의회주의자가 맡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의장이 해야 할 투쟁이 있다면 다수당이 제도의 악용을 통해 다수결 입법으로 독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한 예로 ‘검수완박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인 검찰청법 개정안,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그렇다. 모두 입법에 필요한 숙의 과정이 보장되지 못한 채 처리됐다. 특히 법제사법위원회 사·보임, 민주당 의원의 위장 탈당, 안건조정위원회의 형해화, 회기 쪼개기,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 무력화 과정은 국회와 국회의장의 존재감을 충분히 무력화하고 추락시켰다. 경청·주장·논쟁·토론·투표라는 최소한의 절차가 무시된 채 이뤄졌다. 최소한 90일 이상의 기간이 필요한 법이었는데 다수당인 민주당이 갖가지 꼼수를 부려 21일 만에 억지 통과를 해버렸다.
그렇다 보니 당파적 목적으로 특정 정치인에 대한 검찰 수사를 막기 위한 방탄법, 힘없는 국민의 피해를 간과하는 부실법, 헌법을 유린한 대참사, 민주주의의 퇴행이라는 비판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나마 필자의 기억으로는 유일하게 국회의장의 진면목을 보여준 분은 국회선진화법·노동개혁법 등을 직권상정하라는 여당의 요청을 거부하고 여야 합의로 처리하게끔 한 정의화 전 국회의장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당시 정 의장은 청와대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았고 야당이던 민주당에도 “의장의 도리를 하고 있으니 당신들도 정부에 협력할 것은 협력하라”고 압박해 타협을 이끌어 냈다. 당시 야당 의원들은 ‘국회의장은 중립이 생명’이라며 한쪽 당 편을 들면 안 된다고 했는데, 이제는 민주당에서 민주당 편을 확실하게 할 사람을 국회의장을 시키겠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누가 뭐라 해도 국회의장은 의회민주주의의 최후 보루란 점에서 대통령보다도 중요한 자리다. 그 자리의 격은 문재인정권 5년 동안 현저히 추락했다. 특히 문 전 대통령이 20대 국회 전반기 의장을 지낸 정세균 전 의장을 행정부 2인자인 국무총리에 앉혀 국회의장의 위신을 크게 실추시키기도 했다.
삼권분립의 상징인 국회의장이 대통령 밑에 국무총리로 들어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세균 의장 다음 국회 수장이 된 문희상·박병석 의장도 결정적 고비마다 여당인 민주당에 끌려 다니며 눈치를 보면서 스스로 국회의장의 위상을 계속 추락시키는데 일조를 했다.
문 전 의장은 제1야당을 배제한 채 군소정당들과 밀어붙인 ‘4+1’ 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켰고, 박병석 의장도 ‘검수완박’ 입법 과정에서 의장의 책무를 저버렸다. 두 분이 제동을 걸어야할 소임을 방기해 국회의장 흑역사에 일조한 것이 기록으로 남아 후세에 평가를 받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지켜본 민주당 후임 의장 후보들이 앞다퉈 국회의장의 중립 의무를 팽개치고 너도 나도 ‘대(對) 윤석열정부 투쟁’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의장에 출마했다. 막장도 이런 막장이 또 있을까. 후보들이 민주당을 장악한 ‘이재명 세력’의 눈치를 보는 데 급급한 탓이란 게 중론이다.
167석 중 70~90명으로 추산되는 친명(이재명)계 의원들의 표가 승부를 가를 터이니 이들 눈치를 봐야 한다. 더구나 10만명 넘게 입당했다는 ‘개딸(이재명 지지 2030 여성)’ 등 친명 강성당원들의 입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당 일각에서는 민주당이 이상하리만치 돌아간다는 것을 느끼며 한숨을 쉬면서도 친명 당원들이 두려워서인지 대놓고 반발하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있다. 안타깝다.
국회의장을 한다면서 국회가 아닌 민주당에 충성하겠다는 궤변을 거리낌 없이 늘어놓는 후보들 가운데 그나마 유일하게 “의장이 되면 특정 정파에 좌우되지 않고, 여야의 견제와 균형이 작동되게 하겠다”고 선언했던 이상민 의원의 말을 국회의장의 덕목에 부합하는 행보를 한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하는지 참담하기 이를데 없다.
결국은 우려한 대로 김대중정부에서 청와대 정책기획수석·국무조정실장, 노무현정부에서 경제부총리·교육부총리, 문재인정부에서 국정기획자문위원장을 지낸 5선의 김진표(경기 수원 무) 민주당 의원이 제21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으로 선출됐다.
2년 전 ‘제21대 전반기 국회의장’ 선거에서 박병석 현 국회의장에게 자리를 양보한 것으로 알려진 김 의원은 민주당 내에선 계파색이 강하지 않고 이념적으로도 중도에 가까운 인물로 분류된다. 선수(選數)나 연령(75) 등을 감안할 때 국회의장감으로 여겨지곤 했다.
이와 함께 민주당 몫 부의장으로는 정세균(SK)계를 포함한 범친문과 여성의원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4선 김영주 의원이 선출됐다. 5선 변재일 의원과의 양자대결에서 승리했다. 민주당이 87석의 소수 야당일 때인 민주통합당 시절 자신이 원내대표를 맡아 동물국회를 청산하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강화한 국회선진화법을 이룩해낸 경험이 있다고 강조하는 김진표 국회의장은 “삼권분립이란 민주주의 원칙이 확실하게 작동하는 국회, 불통과 독선의 검찰공화국으로 폭주하는 윤 정부의 불도저식 국정운영을 막아내는 국회, 견제와 균형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국회를 만들고 싶다”며 “국회 주도로 대한민국이 미래로 전진하도록 이끌어가겠다”고 강한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옥(玉)의 티’라고 할까, 다른 후보도 마찬가지지만 최근 그의 언행에 대해선 우려할 대목이 적지 않다. 김 의장은 “의장으로 선출되면 당적을 버려야 하고 국회를 대표하는 역할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을 잘하는 게 바로 민주당을 돕는 길이라고 생각한다”면서도 “제 몸에는 민주당의 피가 흐른다”며 “당적을 졸업하는 날까지 ‘당인’으로서 선당후사(先黨後私)의 자세로 민주당을 위해 최선을 다 하겠다”고 밝혔다. 국회의장에 걸맞지 않게 강한 당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는 얼마 전에도 “민주당은 국회를 통해 꿈과 희망을 이뤄나가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지난 달 민주당의 ‘검수완박’ 법안 강행처리 때도 법제사법위에 투입돼 야당의 심의권을 봉쇄하는 데 한 몫을 톡톡히 해냈다. 일련의 이 같은 행보가 당내 경선을 의식한 전략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는 필자의 사견이지만, 국회의장으로선 부적절한 마음가짐으로 느껴져서다.
국회의장이 되면 본래의 합리적 모습으로 돌아가 국회를 공정하고 균형감 있게 이끌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것이 국회의장이 당적을 버리도록 한 국회법 정신이다. 더욱이 후반기 국회는 대통령 권력과 국회 권력이 다른 분점(分占) 정부로서 1987년 민주화 이후 가장 극심한 여소야대가 됐다.
노파심에 한마디 한다면 대통령과 여야 모두 당심(黨心)·사심(私心)을 버리고 오직 국민만을 생각하는 자세가 되지 않으면 여야 간 또는 대통령과 국회 간 충돌로 입법 기능이 마비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특히 새 정부와 여야도 ‘협치’ 두 글자를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최근 한덕수 국무총리 인준에 민주당이 대승적 차원에서 대응한 것이나 엊그제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가 “여야 협치를 위한 한 알의 밀알이 되겠다”며 후보직을 사퇴한 것은 모두 협치 차원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이와 유사한 연유로 민주당이 올 6월부터 법제사법위원장을 국민의힘에서 맡기로 한 합의를 깨겠다는 건 부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과거로부터 국회의장·법사위원장을 원내 1·2당이 나눠 맡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이는 어느 당의 일방 독주를 사전에 막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였기 때문이다.
여야 갈등 원인은 민주당의 몰상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문제는 민주당이 다수의 의석을 빙자해 국회의장과 법사위원장을 독식하려고 하는 데 있다. 민주당은 후반기 법사위원장을 국민의힘에 맡기겠다고 한 지난해 7월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의회민주주의 정신에 합치되는 것이고, 국민과 여당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자 상식이다.
그럼에도 박홍근 민주당 원내대표는 원구성 문제와 관련 “향후 2년에 대한 원구성 협상의 법적 주체는 현재 원내대표”라면서 전임자와의 협의를 부인한 채 원점에서 논의할 것을 강조했다. 이에 뒤질세라 윤호중 공동비상대책위원장도 “후반기 법사위원장을 국민의힘에 주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앞서 21대 총선에서 압승한 민주당은 국회의장과 법사위원장을 포함한 18개 상임위원장을 독식, 권력의 힘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다 지난해 민주당 인사들의 성추문으로 실시된 ‘4·7 성추행 재보궐선거’에서 참패를 당한 후 후반기 법사위원장을 국민의힘에 넘기기로 합의를 했다. 이는 재보선을 의식, 야당과 협치한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다 정권이 바뀌자 ‘야당 몫’ 운운하며 억지를 부리고 있다. 가히 후안무치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원내대표가 바뀌었으니 다시 협상해야 한다는 주장도 어불성설이다. 민주당이 전임 원내지도부가 합의한 내용을 지키는 건 상식이다. 약속을 어기는 건 주권자인 국민을 무시하는 처사다.
결국 민주당이 이처럼 약속을 뒤집으려는 이유는 뻔하다. 민주당은 부인하겠지만, 정권을 잃고 야당으로 전락하면서 국회의장과 법사위원장 자리를 손에 쥐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국회를 자기들 입맛에 맞게 좌지우지 하겠다는 속셈이다.
법사위는 모든 법안을 만들거나 고칠 때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길목이다. 굳이 경고를 한다면 어떤 이유를 내걸든 민주당의 여야 합의 파기는 ‘정치금도(政治襟度)’에 어긋난 행태로서 결국 또 한번 민심의 지탄을 자초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국민은 친정 정당의 압력이 있더라도 중립 의무를 지키고, 입법의 절차적 정당성을 지키는 국회의장을 보고 싶어 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 :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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