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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최근에 출판물과 관련한 명예훼손 고소 사건을 다루면서 관련 판례들을 검색하게 되었다. 마침 ‘제국의 위안부’라는 저서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혐의로 기소됐던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6년 만인 올해 10월26일 내려졌다. 이 사건은 본래 1심에서는 무죄였다가 2심에서 유죄로 번복됐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2심을 무죄 취지로 파기하고 다시 재판할 것을 명했다. 그래서 이 기회에 2017년 1월25일 선고된 1심 무죄 판결의 이유를 다시 짚어 보고자 한다.
박유하 교수에 대한 혐의는 허위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인데 죄가 성립되려면 우선 ‘사실의 적시’가 있어야 한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사실의 적시’란 가치 판단이나 평가를 내용으로 하는 ‘의견 표명’에 대립되는 개념이며 시간·공간적으로 구체적인 과거 또는 현재의 사실 관계에 관한 보고나 진술로 그 표현 내용이 증거에 의해 증명이 가능한 것을 말한다. 반면에 ‘의견’은 단순한 사실과 구별되는 가치 판단으로서 어떤 인식이나 견해를 갖거나 평가·판단하거나 태도를 결정하는 등의 정신적 활동의 표현을 뜻하는데, 이 경우 사실의 적시가 아니라서 명예훼손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제국의 위안부 사건 1심 재판부는 판례 논리에 따라 검사가 기소한 35개 표현이 사실의 적시인지 아니면 (순수)의견의 표명인지를 꼼꼼히 분석했다. 그 결과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 중에는 자발적 의사로 위안부가 된 사람도 있다’는 표현과 ‘일본국이나 일본군이 공식적인 정책을 통해 조선인 여성을 유괴하거나 물리적으로 강제 연행해 위안부로 만든 사실은 없다’는 부분만 사실의 적시에 해당되고 나머지는 의견 표명으로 보았다. 그래서 재판부는 위 두 가지 표현에 대해서만 명예 훼손 여부를 살폈다.
이와 관련해 재판부는 위안부 피해자의 사회적 가치나 평가의 핵심은 이들이 ‘의사에 반하여’ 성적 학대를 받고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한 데 있다고 보았다. 의사에 반한 이상 이들이 폭행·협박이 아니라 학교에 보내 준다거나 취업시켜 준다는 말에 속아서 위안부가 됐는지, 이들을 데려간 주체가 일본 군인인지 아니면 민간인 포주나 업자인지, 일본 정부나 군대가 공식적인 정책으로 동원했는지 아니면 개별 군인의 일탈 행위로 연행했는지는 위안부의 사회적 가치와 평가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1심 재판부의 입장이었다. 이 논리에 따라 일본 정부나 군대 차원에서 조선인 여성을 유괴하거나 강제 연행해 위안부로 만든 사실은 없다는 주장은 명예훼손의 혐의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한국인의 사고에는 어느 날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느닷없이 들이닥친 일본 군인에게 강제 납치된 소녀를 위안부의 원형으로 보는 신화가 자리 잡았다. 이 틀에서 벗어난 사례 제시는 몹시 불경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물타기 해 줄 수 있다는 ‘사회운동적 고려’가 주류적 인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운동가의 논리이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명예와도 사실 무관한 것이다. 그러나 자발적 의사로 위안부가 된 사람도 있다는 표현은 위안부의 사회적 가치나 평가를 저하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한편 명예훼손죄는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단체에 대한 명예를 훼손해야 성립된다. 그래서 집합적 명칭을 사용해 명예를 훼손하는 이른바 ‘집단 표시에 의한 명예훼손’은 그 구성원의 수가 많으면 개별 구성원에 대한 비난의 정도가 희석되어서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 판례의 법리다. 강용석 전 의원의 여성 아나운서 모욕 발언도 그래서 무죄가 되었다. ‘여성 아나운서’라는 집단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개별 아나운서들의 사회적 평가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 이유였다.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조선인 위안부의 경우도 많게는 32만 명에 달한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로 집단이 크다. 반면에 위안부피해자법에 따라 등록한 피해자 수는 고작 230명에 불과하고 당시 상황을 증언한 사람은 이 중에서도 일부라고 한다. 그래서 위안부가 처했던 구체적인 상황을 알 수 없고 표현 자체도 모든 위안부가 자발적인 의사로 위안부가 됐다고 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 전체의 명예를 훼손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재판부는 끝으로 명예훼손의 고의도 부정했다. 박유하 교수의 집필 의도는 위안부 문제가 20년 넘게 해결되지 않고 한·일 양국 간의 인식의 괴리가 더욱 커져가는 상황에서 위안부 지원 단체나 소수 연구자들에 의해 좌우되는 주류적 시각과는 다른 입장도 제시하여 한·일 양국의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고 상호 신뢰와 평화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위안부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하겠다고 굳이 학술 서적을 저술할 리도 없다.
사실 표현의 자유는 명예훼손과 충돌할 수 있다. 그러나 표현 대상이 공적 관심사안이고 피해자도 공적 존재인 경우 표현의 자유가 더 보장되어야 하고 명예훼손의 고의 인정에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 판례의 법리이다. 학문적 연구 결과의 발표는 학문의 자유의 보호 대상도 되기 때문에 다른 언론·출판에 비해서도 고도의 헌법적 보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1심 재판부는 바로 이런 판례 법리에 충실했던 것이다. 문제된 표현들에 대한 당부 판단은 학문의 장, 나아가 사회 공론의 장에서 자유로운 의견 교환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법리에 충실했던 1심 판결이 2017년 10월27일 2심에서 유죄로 번복되었다가 이번 대법원 판결로 제자리를 찾기까지 6년의 시간이 흘렀다. 아직 파기 환송심 재판이 남긴 했지만 표현의 자유·학문의 자유의 지평을 넓혀 준 박유하 교수와 그를 도운 분들께 경의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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