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126] 가족이 된 타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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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이 된 아버지와 아들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7-08 06:30:10

천길자와 달봉에게 아버지는 우리 집 문간방을 거처로 내주었다. 활달하고 친화적이었던 천길자는 침체되어 있던 교회에 활기를 불러일으켰다. 교회 안팎을 반짝반짝 쓸고 닦았으며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다. 유명무실하던 성가대를 떠맡으며 교인들의 지지도 단번에 얻어 냈다.

성가대가 천길자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작은 예배당을 아름다운 화음으로 가득 채우던 날, 그녀의 등장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데 이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별한 목사와 이혼한 여자가 결혼도 하지 않고 한 울타리 안에 사는 것이 불필요한 입방아를 일으킬 것이라 염려한 교인들은 서둘러 재혼을 권유했다. 처음엔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아버지였지만 고심 끝에 그녀를 새 아내로 맞아들였다. “당신의 뜻이라면 따르겠습니다.” 아버지는 십자가 앞에서 두 손을 모았다. 천길자가 나의 엄마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달봉이와 나는 서류 안에서 형제가 되었다.

놀이터에 앉아 있던 나는 큰아이가 좋아하는 로켓 발사대 모양의 미끄럼틀을, 작은아이가 좋아하던 그네를 노려보았다. 조용한 놀이터는 현실의 공간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도 멈춘 듯했다. 아무도 타지 않은 그네는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았다.

가끔 놀이터에 나가 아이들을 그네에 태워 준 날이면 이따금 꿈을 꾸었다. 나는 그네를 타고 있었다. 파란 하늘이 가깝도록 날아올랐다가 내려오면 아버지의 손이 등에 닿았다. 까르륵 웃음이 터졌다. 충만한 비상이었다. 그러나 다시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가 내려왔을 때는 손길이 느껴지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면 아버지가 없었다. 그네는 더 높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영원히 지면에 닿을 수 없을 것 같아 무서웠다. 땡볕은 뜨겁고, 손에 쥔 쇠줄은 델 것처럼 뜨거웠다. 울음을 터뜨려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네는 멈추지 않았다. 발은 땅에 닿지 않았다. 날이 저물고 어둠이 내렸다. 그네에서 내려오지 못한 채 밤이 깊어 갔다.

재혼 후 아버지가 감정의 기복을 드러낸 것을 나는 본 적 없었다. 청교도와 같은 근엄함과 한결같은 강직함으로 교인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나에 대한 아버지의 부드러움은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소멸되었다. 아버지도 나를 그리워한 적 있을까. 내게 미안했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에겐 내가 필요 없었다. 그에겐 새로운 아내와 또 다른 아들이 있었다.

본가와 연락하지 않던 나와 달리 아내는 곧잘 그쪽과 안부를 주고받았다. 특히 시동생이 되는 달봉과는 제법 죽이 맞았다. 공개 입양된 아내와 뒤늦게 어머니를 찾아 새아버지를 얻은 달봉이와는 공감대가 있으려니 했다.

내게 가족이란, 실체가 없는 과장된 이데올로기 같은 것이었다. 생명은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또 다음 세대를 이어 가는 것은 지극히 동물적인 대물림의 본능이었다. 새끼를 낳고 기르는 것이 암컷의 역할이었지만 나를 보살필 어미는 세상에 없었다. 수컷은 다른 암컷을 얻어 세력을 확장했고 나는 아비로부터 추방되기 전에 스스로 독립했다. 떠난 자식은 아비의 영토로 돌아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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