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쓰는 역사 [23] 꼿꼿이 선 줄기에서 태양같이 밝게 웃는 접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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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꽃에 자신의 불운을 투영한 최치원

스카이데일리 기자페이지 + 입력 2024-08-05 09:03:25

▲ 접시꽃은 줄기를 벽 삼아 기댄, 세워놓은 접시처럼 생겼다. 윤상구 사진작가

모양이 접시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 접시꽃. 그렇다고 평평하게 가로 놓인 접시를 떠올리면 안 된다. 접시꽃은 줄기를 벽 삼아 기댄, 세워놓은 접시처럼 생겼다. 키 크고 싱싱하게 곧추선 줄기에 당당하게 매달린 접시꽃은 생명력이 넘쳐 보인다. ‘촉규화’라고도 불린 접시꽃은 마을 어귀와 도심의 작은 화단·담장 안팎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잘 자라나는 적응성 좋은 식물이다.

“접시꽃, 사람들에게 버림받아도 참고 견디네”

신라의 학자 최치원은 돌보지 않아도 잘 자라는 접시꽃의 특성을 포착하여 한시를 지었다. 꽃을 소재로 시가를 지을 때는 그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최치원은 접시꽃에 감정 이입하여 신분의 한계 때문에 날개를 펼 수 없었던 자신의 불운을 한탄했다. 시의 구절구절에 자신의 마음속 생각을 다 드러낸 셈이다.

“적막하고 거친 밭가에 접시꽃/ 무성한 꽃송이 여린 가지를 눌렀네/ 날리는 향기에 유월 비마저 그치고/ 바람에 고개 숙인 보리 그림자 기우네/ 수레와 말 탄 사람 그 누가 보아주리/ 벌 나비만 부질없이 엿보네/ 천한 땅에 태어난 것이 스스로 부끄러워/ 사람들에게 버림받아도 참고 견디네”

868년 당나라로 유학 간 최치원은 18세에 외국인 대상으로 치러진 과거 빈공과에 장원 급제했다. 농민 반란인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난 후 880년에 그는 당나라 관리 종사관이 되었다. 문서 작성 업무를 맡아 4년 동안 1만여 편의 글을 써낸 최치원은 문장가로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반란군 우두머리를 놀라게 한 ‘토황소격문’

▲ 접시꽃은 줄기를 꼿꼿이 세우고 강한 생명의 에너지를 전하는 태양 같은 꽃이다. 윤상구 사진작가

그 무렵 최치원은 반란군의 우두머리 황소를 나무라고 회유하는 내용의 ‘토황소격문’을 썼다. 이 격문을 읽은 황소가 너무 놀라 침상에 주저앉았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그 내용은 담대하고 문장은 힘이 넘쳤다. ‘토황소격문’으로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고 승진도 했다. 그 격문의 힘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얼마 후 수세에 몰린 황소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반란이 진압되었다.

885년 신라로 돌아왔을 때 최치원의 나이는 28세였다. 그는 헌강왕에게 발탁되어 외교 문서 등을 작성하는 문장가의 일을 맡았다. 왕명을 받아 일하면서 문장가로서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신라에는 골품제라는 엄격한 신분제도가 있었는데 최치원은 귀족이 아닌 6두품이었기에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벼슬에 오를 수 없었다.

심지어 당시 신라는 망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개혁이나 새로운 제도의 도입을 내놓는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래도 최치원은 진성여왕에게 시무책을 올렸다. 그 확실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진골 독점의 귀족 정치를 비판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이 시무책을 받아들인 진성여왕은 최치원을 6두품의 최고 벼슬인 아찬에 임명했다. 그러나 진골의 반발이 심했는지 시무책은 실행되지 못했다.

최치원의 외롭고 적막한 심경이 드러난 ‘추야우중’

낙담한 최치원은 관직에서 물러나 산속에 은거하거나 여러 곳을 유람하며 말년을 보냈다. 그의 시 중 “산은 세속을 떠나려 하지 않는데 세속은 산을 떠나려 한다”라는 구절에서 속리산의 이름이 생겨났다는 설도 있고 그가 가야산에서 쓴 시 ‘추야우중(秋夜雨中)’은 고교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유명하다.

“가을바람에 힘들여 읊지만/ 세상에는 나를 알아주는 이 없네/ 창밖엔 깊은 밤 비 내리는데/ 등불 앞에는 만 리 밖으로 내닫는 이 마음”이라는 내용의 ‘추야우중’. 비 내리는 차가운 가을 밤을 배경으로 한 이 시에는 최치원이 얼마나 외롭고 적막한 나날을 보냈는지 여실히 드러나 있다.

웬만큼 벼슬에 올랐고 왕의 인정도 받았으니 그 정도면 되지 않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 그가 귀족으로 태어나 원하는 벼슬에 올랐다고 반드시 세상을 바꾸고 망해가는 나라를 구했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어찌 보면 자신이 특별한 일을 할 수 있다는 자만이 스스로를 괴롭혔을 수도 있다. 이유야 어떻든 그가 겪은 아픔과 좌절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최치원은 상처 입은 자신의 처지를 접시꽃에 투영하여 서글픈 시를 지었지만 접시꽃은 오늘도 당당하게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접시꽃은 무덤가에 피었다가 잊히고 마는,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망각의 꽃이 아니다. 생활 공간 가까운 곳에서 줄기를 꼿꼿이 세우고 강한 생명의 에너지를 전하는 태양 같은 꽃이다. 길을 가다가 그런 꽃을 만나면 “아, 접시꽃이 예쁘게 피었구나”라고 한 마디쯤 건네볼 일이다. 그러면 접시꽃은 내년에도 그 이후에도 할머니같이 후덕한 얼굴로 우리를 반길 것이다.

[글 황인희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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