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163] 11월에 핀 개나리의 말로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연재소설

결혼행진곡과 죽음의 전주곡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8-29 06:30:10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신분과 이름을 밝힌 로엔그린은 그러나 금기를 깼다는 이유로 다음 날 신부를 떠났다. 엘자는 신랑을 거역했다는 후회와 그 처벌에 대한 충격으로 숨을 거두고 만다. 결혼식은 신랑의 손을 잡으러 다가서는 신부에게 ‘그 입부터 다물라’ 경고하는 것이다.

“신부들이여, 첫날밤부터 입술 깨물고 남편의 발밑에 엎드려 순종하라. 너무 많이 알려고 마라. 시끄럽게 입을 놀리면 남편은 영영 너를 떠날 것이니!”

‘로엔그린’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결국 ‘혼례의 합창’은 죽음의 전주곡인 것이다.

“개나리가 피어 있었어요.”

로엔그린을 생각하고 있을 때 나를 내려 주고 돌아간 줄 알았던 하운이 곁에 서서 말했다.

“그렇게 반가워하지 않아도 돼요.”

놀란 내 표정을 보고 하운이 살짝 미소 지었다.

“결혼식 일주일 전에 공원에서 야외촬영을 했거든요. 11월이었는데 개나리가 피다니 신기하잖아요. 행복의 암시라고 굳게 믿었지요. 바라는 대로 해석하고 생각한 대로 믿는 게 사람이잖아요. 그때 만약 내가 불안해하고 있지 않았다면 이상기후나 지구온난화를 운운했겠죠. 행운으로 해석하는 일 따윈 절대 하지 않았을 거예요. 결혼식 날엔 첫서리가 내렸어요. 꽃들은 내 결혼식 날 얼어 죽었을 거예요. 잘못된 판단을 하고 피어난 잔혹한 대가죠.”

하운은 홀에 설치된 대형 화면 속 신랑 신부를 바라보았다. 나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결혼식을 지켜보았다. 아무도 듣지 않는 주례사. 하객들이 건성으로 치는 박수 소리. 모처럼 만난 친척들이 주고받는 어색한 인사말과 의례적인 웃음으로 실내는 소란하고 어수선했다. 그래도 화면 속 신랑은 연신 벙글거렸고 기어코 행복을 손에 쥔 듯 유리는 부케보다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가정법원은 건물 2층에 있었다. 로비에서 50여 쌍의 부부가 이혼을 기다렸다. 나는 빈 의자를 찾아 앉았다. 아내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조곤조곤 나누는 이야기 소리부터 시끌벅적하게 다투는 소리까지, 이혼 판결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싶었는데 꽤 소란했다.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던 젊은 부부는 이혼하러 온 것 같지 않게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자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여자는 번번이 웃었다. 그 옆에 등을 돌리고 앉은 오십 대 부부는 장사라도 하다 뛰어왔는지 여자의 굵은 허리에는 전대가, 남자의 추레한 점퍼와 축 늘어진 바짓단엔 흙이 묻어 있었다. 한쪽에선 보석으로 치장한 중년의 아내가 의자에 앉아 잡지를 뒤적였고 신사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중년의 신사는 멀찍이 창밖을 내다보며 서 있었다.

어떤 부부는 소란스럽게 소리를 내질렀다. 이어 겁먹은 아이의 울음이 터졌다. 왜 아이를 여기까지 데려왔느냐, 그럼 어디에 맡기느냐, 그들은 좀 전에 다투던 문제는 아랑곳없이 아이 문제로 다시 큰 소리를 내며 싸웠다. 창피하게 이러지 말라는 아내의 말에 남자가 상소리를 내뱉으며 의자를 발로 차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여자는 겁을 먹은 채 울먹이는 아이를 끌어안고 눈물을 닦아 주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김규나 필진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