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쓰는 역사 [32] 분카 대화재 이후 일본에 찾아온 나팔꽃 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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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에 활기 띤 나팔꽃 품종 개량

스카이데일리 기자페이지 + 입력 2024-10-14 11:30:24

▲ 나팔꽃은 아주 적은 양의 대기 오염 물질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예민한 식물이다. 윤상구 사진작가

나팔꽃은 아침에 피었다가 한나절 만에 지기 때문에 영어로 모닝글로리라고도 한다. 그런데 모닝글로리는 1000여 종에 달하는, 나팔처럼 생긴 메꽃과 꽃을 모두 아우르는 이름이다. ‘아침의 영광’이라는 멋진 뜻을 담고 있지만 모든 모닝글로리가 다 아침에 피는 것은 아니고 메꽃처럼 때를 가리지 않고 피어나는 종도 있다.

대기 오염 측정 도구로 쓰이는 예민한 식물

나팔꽃은 예민한 식물이다. 오존‧이산화황 등 대기오염물질의 아주 적은 양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여 잎 표면에 붉은 반점을 만든다. 그래서 나팔꽃은 대기오염 측정이나 관련 실험에 유용하게 쓰인다. 또 아래쪽 덩굴의 잎이 오염되어도 위쪽에 새로운 잎이 계속 자라는 습성 덕분에 시간에 따른 오염 정도를 알아내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경기도·충청도·전라도·황해도·강원도에서 재배하는 약재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나팔꽃은 조선 초기에도 이미 한반도에서 자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는 4세기부터 약초로 널리 쓰였는데 나팔꽃 씨앗은 소 한 마리와 바꿀 정도로 값어치가 있다고 하여 견우자(牽牛子)라 불리기도 했다.

나팔꽃은 현재 일본에서 가장 흔히 만날 수 있을뿐더러 일본 사람들에게 각별한 사랑을 받는 식물 중 하나이다. 일본에서 나팔꽃은 여름철을 상징하는 꽃이며 초등학교 꽃 키우기 과제로 가장 많이 쓰이는 식물이기도 하다.

나팔꽃이 일본 문화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에도 시대부터이다. 에도(江戸)는 지금의 도쿄 지역인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를 중심으로 이뤄 낸 에도 바쿠후(幕府)가 집권하던 때를 에도 시대라 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15년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고 천하 패권을 확립하며 일본 전국 시대의 마침표를 찍었다.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룬 에도 시대

▲ 어두운 밤이 지나고 해가 뜨면 나팔을 활짝 펼쳐 ‘아침의 영광’을 찬미하는 나팔꽃. 윤상구 사진작가

1630년 무렵 에도 바쿠후는 쇄국정책을 채택했다. 내국인의 외국 여행을 금지했고 나가사키를 통해 교역하던 중국과 네덜란드 상인 외에는 외국인과의 접촉을 막았다. 가톨릭 선교사들을 앞세운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식민지 확장 정책이 일본에도 위협이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쇄국정책에도 1680∼1700년대 초 일본 경제는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견직물과 종이·도자기·양조 산업이 번창하면서 생산과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에도는 물론 오사카·교토 등이 대도시로 발전했고 상업 발전에 따라 등장한 부유한 상인 계층은 도시의 문학과 예술 발전에 기여했다.

상인들과 수공업자는 약진했지만 농업 생산에 수입을 의존했던 다이묘와 사무라이들은 세력을 잃고 재정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막판에 에도 바쿠후는 농민이나 사무라이들의 봉기, 밀려드는 서양의 침략 위협에 시달렸다. 186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런 심각한 문제들의 해결을 천황의 직접 통치에 맡겨야 한다는 요구가 커졌다.

에도 시대는 1867년 11월의 다이세이호칸(大政奉還) 때까지 약 252년 동안 지속되었다. 다이세이호칸은 에도 바쿠후 제15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국가 통치권을 메이지 천황에게 반납한 사건이다. 요시노부는 새로운 정치 체제 아래서 권력을 다시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자발적으로 통치권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에도 바쿠후가 사라지고 일본 근대화가 시작되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나팔꽃 붐은 에도 시대의 안정과 평화를 증명

▲ 에도 시대에는 나팔꽃 개량종이 쏟아져나오고 나팔꽃 붐이 일어났다. 윤상구 사진작가

에도 시대에는 나팔꽃 개량종이 쏟아져나오고 나팔꽃 붐이 일어났다. 그 계기는 1806년에 일어난 분카(文化) 대화재로 이때 불에 탄 폐허에서 이상한 모양의 나팔꽃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엄청난 온도 변화 때문에 성분이 달라진 토양에서 생겨난 일종의 변종이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일본 사람들은 나팔꽃 개량에 힘을 기울였는데 이 시기에 개량된 품종을 ‘변화 나팔꽃’이라고 한다.

에도 시대 말에 이르러서는 일본에서 개량된 나팔꽃 품종이 1200여 종에 달했다고 한다. 애호가들은 희귀한 품종을 사들여 진열하며 수집 취향을 과시했고 그 과정에서 원예 문화도 급속도로 발전했다. 나팔꽃 그림이나 재배 방법을 다룬 책들이 출판되었으며 나팔꽃을 고가에 거래하는 전문 상인들도 등장했다.

에도 시대는 전란이 끊이지 않았던 이전 시대와는 달리 큰 혼란이나 전쟁 없이 평화가 유지된 시기였다. 나팔꽃 붐은 에도 시대가 그만큼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안정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관상용으로 식물을 키우고 한가롭게 꽃을 즐기는 것은 먹고살 만한 평화 시에나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피어난 새로운 모양의 꽃과 활발하게 이어진 품종 개량. 엄청난 재난 뒤에도 희망의 싹이 트고 그 희망을 바탕으로 새로운 역사를 펼쳐 가는 의지의 서사시와 같은 얘기다. 어두운 밤이 지나고 해가 뜨면 나팔을 활짝 펼쳐 ‘아침의 영광’을 찬미하는 나팔꽃. 문득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대사가 떠오른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글 황인희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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