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198] 찰나가 영원이 되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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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았어? 당신의 마리아를?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0-25 06:30:10

하운이 내 등을 다정하게 토닥였다. 나는 눈을 감았다. 하운과 만난 지 수십 년은 지난 것 같았다. 찰나의 시간이 영원이 된다는 말을 나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운과 마주 서서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가 차에 올랐다. 떠나는 하운의 뒷모습을 나는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당신. 참 나쁘다.”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대문 앞 불 꺼진 가로등 아래 아내가 서 있었다.

현관에 들어선 아내는 마음껏 어질러진 집안 꼴을 보고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밥을 해 먹은 적도 없지만 설거지를 해 본 적도 없는 개수대에는 물컵과 맥주 캔·술잔들이 쌓여 있었다. 싱크대를 열어도 꺼내 쓸 컵 하나가 없는 것을 확인한 아내는 코트를 벗어 식탁 의자에 걸더니 거의 무의식적으로 고무장갑을 집어 들었다. 장갑을 끼고 수도꼭지를 돌려 물을 세게 틀어 놓던 아내는 문득,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정신이 번쩍 깬 사람처럼, 성급히 벗느라 양쪽 모두 뒤집힌 고무장갑을 개수대에 내팽개쳤다. 수도꼭지를 잠그고 냉장고를 열었다. 물을 마시고 싶었을 아내는 넉넉히 채워져 있던 맥주 캔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캔을 따는 그녀의 손이 가엽게도 떨렸다.

거실에 서서 아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나는 캔을 빼앗아 뚜껑을 따 주었다. 나를 쏘아보던 아내는 활활 타고 있는 불구덩이에 석유를 붓듯 맥주를 삼켰다. 나는 너저분하게 어질러져 있던 옷가지와 수건들을 집어 들어 작은방에 던져 놓았다. 거실이 나의 마지막 장소가 될 터였으므로 소파로 돌아와 코트를 벗어 던져 놓고 테이블 위도 주섬주섬 치웠다. 어이없다는 듯 내 모습을 지켜보던 아내가 식탁 위에 탁, 빈 캔을 내려놓으며 등을 보이고 의자에 앉았다.

“애들, 꼭 그렇게 울리고 가야 했어?”

아내는 선뜻 하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테지만 이혼한 상태였고 또 달봉이 걸렸을 것이다. 아내의 질문에 나도 대답할 수 없었다. 대신 시계를 쳐다보았다. 열두 시까지 겨우 50분이 남아 있었다.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 상황을 설명하는 것도, 하운과 어떤 관계인지 변명하는 것도 지금의 나로선 무의미했다. 설사 아내가 나조차 받아들일 수 없는 사태를 모두 이해한다고 해도, 그것이 아내를 위하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차라리 지금 이대로 나를 원망하도록 해 주는 것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그녀에게 베풀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다.

“그만 가 줄래?”

내가 주방으로 가서 개수대의 물을 틀며 말했다. 소매를 걷은 나는 수세미에 세제를 묻히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붕대를 감은 오른손에 물을 묻히지 않으려니 잘 되지 않았다.

“찾았어?”

아내가 내 등에 대고 물었다.

“뭘?”

“마리아. 당신의 마리아.”

내가 수세미를 손에 쥔 채 뒤돌아섰다. 비난과 조롱을 담고 아내가 나를 쏘아보았다. 피식, 나는 웃었다. 쓴웃음이 곧 킥킥거리는 비웃음으로 바뀌었다.

“달봉이 그 자식하고 많은 걸 나누었구나.”

내가 씹어뱉듯 말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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