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207] 세월을 건너 완성된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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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결수, 살아 있는 나의 이름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1-07 06:20:04

- 봄볕에 녹아 사라지는 겨울 눈처럼, 그리움이 완성되자 급격히 당신의 기력은 소진되었습니다. 보름달이 둥실 떠올라 거실을 환하게 내리비추던 크리스마스이브, 당신은 내 무릎을 베고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파도 소리가 어둠을 완강히 밀어내던 밤, 당신과 함께 둥근 달을 바라보고 싶었던 38년 전 나의 바람을 당신은 그렇게 이루어 주었습니다. 이제 당신은 아내 곁에 누웠고, 나는 미하엘의 곁으로 돌아갑니다. 당신과 영분, 미하엘과 나, 참으로 오랜 세월을 건너 네 사람의 인연이 완성되었습니다.

젊은 날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은 사랑이었습니다. 격정과 갈망, 그리움과 기다림, 미움과 원망이 뒤섞인 혼란이었지요. 움켜쥐려 했으나 사랑은 언제나 달빛처럼 손에서 빠져나갔습니다. 하지만 미하엘이 햇빛 같은 사랑이었듯, 당신은 나의 어둠을 비추는 달이었습니다.

주결, 나는 후회 없이 내 인생을 살았습니다. 미하엘을 사랑했고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미하엘을 잃고 당신을 잃어서 슬프지만, 이제는 압니다. 참된 사랑은 언제나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을. 결코 나를 무너뜨리지 않는다는 것을.

며칠 전 변호사가 전해 준 에바의 노트를 나는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창살이 촘촘히 박힌 작은 유리창을 올려다보았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었고, 하늘은 낮고 흐렸다. 유치장에 있다가 검찰 조사를 받고 구치소로 이송되어 온 지 열흘째였다. 내가 입고 있는 옅은 오렌지빛의 수인복에는 아직은 낯선 수용자 번호가 왼쪽 가슴에, 나를 가둔 방의 위치가 새겨진 표찰이 오른쪽 가슴에 붙어 있었다.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욕망하는지 알게 된다면 내 존재의 의미도 알 수 있으리라 여겼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인지 나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강무훤이라는 이름 대신 식별 번호를 부여받았지만, 숫자가 나를 설명해 줄 수는 없었다. 죄를 저질렀으나 헌법이 보장하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아직 나는 죄인도 아니었다. 재판을 받고 형이 확정되기 전까지 무죄인지 유죄인지 판단이 유보된 상태, 나는 미결수였다.

그날 눈을 떴을 때, 푸르스름한 빛이 시시각각 강도를 달리하며 번쩍거렸다. 나는 빛을 좇아 장면을 바꿀 때마다 실내의 조도를 바꾸는 텔레비전의 화면을 낯설게 쳐다보았다. 지난밤 음량을 줄인 채 켜 놓았던 TV의 아침뉴스가 스튜디오와 현장을 번갈아 내보내고 있었다.

어떤 상황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신데렐라의 알람이 울렸던 것이 기억났다. 나는 손을 뻗어 거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스마트폰을 켰다. 날짜와 시간을 확인했다. 12월21일 월요일 오전 5시4분. 나는 눈을 힘주어 깜빡여 보았다. 부스스,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가 거울 앞에 섰다. 멀쩡했다. 가시도, 통증도 없었다. 얼굴에는 생기마저 돌았다. 최 박사가 말한 약효의 지속 시간이 끝났어야 할, 심장에 박힌 시한폭탄이 붕, 터졌어야 할 밤 12시를 훌쩍 넘기고도 나는, 살아 있었다.

거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집안을 휘둘러보았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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