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29] 혼자의 자유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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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1-20 06:30:34

기순은 알고 있었다. 기순과 점심은 대개 종로서적 뒤에 있는 500냥 하우스에서 해결했다. 기순이는 잔치국수를 좋아했다. 국수 한 그릇 먹는 데 5분이 채 안 걸렸다. 식사 속도만 빠른 게 아니라, 기순은 뭐든 빨랐다. 오래 고민하거나 망설이는 법이 없었다. 급한 성격이라고 핀잔줬더니, 형제자매가 많은 집에 태어나면 뭐든 빨라진다고 했다. 승연은 처음에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빼앗길까 봐 빨라지고 빼앗기 위해서 빨라진 거라고 했다. 망설이거나 기다리면 빼앗긴다고.

기순은 종종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과 복잡한 가족 관계 등을 승연에게 털어놓곤 했다. 첩이었던 어머니가 큰집에 얹혀 살면서 큰집 어머니의 시집살이를 호되게 겪은 일은 여느 드라마에 나오는 첩살이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제일 먼저 일어나 대가족 아침 식사 준비를 혼자 도맡았고 빨래며 밭일이며 바느질까지 모두 기순 어머니 몫이었다. 큰집 어머니는 자식 아홉을 낳았는데 아들은 하나뿐이었다. 뇌성마비로 태어난 아들에게 실망한 할아버지는 큰집 어머니를 내쫓으려다 아들의 첩을 들이는 것으로 분을 삭였다. 큰집 어머니와 아버지는 사이가 안 좋았고 큰집 어머니는 그걸 기순 어머니 탓이라고 생각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기순 어머니만 예뻐해서.

기순이가 태어나자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실망했지만 곧 기순을 복덩이라며 예뻐하기 시작한 건 할아버지 땅 옆으로 도로가 나면서부터였다. 산비탈에 자리잡은 할아버지 땅은 고작 작물이나 심었던 척박하고 쓸모 없는 땅이었다. 진작부터 임자가 나오면 팔겠다 했던 땅은 오랫동안 방치돼 있었고 내 땅이오, 표시로 말뚝 박아 놓고 가끔 산책 삼아 둘러보던 곳이었다.

그곳 일대에 골프장이 들어서면서 할아버지의 땅은 적당한 값에 팔리게 되었다. 산을 깎아 만든 골프장으로 비싼 자동차들이 드나들면서 주변에 음식점이 생겼다. 기순 어머니는 음식 솜씨가 좋아 골프장 입구 도로 쪽 한 마지기를 할아버지로부터 받아 한정식 식당을 차렸다. 외제 고급 승용차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순이네 식당 마당에 즐비했다. 기순이 어머니는 식당 수입의 반을 할아버지께 드렸고 또 그 반을 큰집 어머니께 드렸다. 기순 어머니의 시집살이는 멈췄다.

기순은 우울한 이야기를 밝은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첩이 승리했다면서.

유학하고 싶은 이유가 혼자 살아보고 싶어서, 였다. 기순의 소원은 혼자만의 방에서 맛있는 음식을 나누지 않고 천천히 먹는 것이었다. 반찬이 사라질까 불안하지 않으면 빨리 먹지도 않겠지. 학교 졸업하고 취직해도 혼자 살 기회는 오지 않을 거야. 그러다 결혼하겠지. 그러니 유학 가야 해.

기순의 ‘그러다 결혼하겠지’라는 말에선 공감할 수 없는 서글픔이 묻어났다. 승연은 혼자 방을 써도, 혼자 맛있는 반찬을 다 먹어도 평생 혼자 살 기회는 없겠구나. 아버지가 딸의 손을 사위에 넘겨준다는 건, 결코 독립된 삶을 살아 본 적이 없는 인생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문득 기순의 꿈이 부러웠다.

기순이 유학을 응원해, 파이팅.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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