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76] 달콤한 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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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4-02 06:30:06

희숙이 샤워를 끝내고 수건 한 장으로 몸을 가린 채 화장실 밖으로 나왔을 때 권지호는 이미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은 채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불은 꺼져 있고 가로등 불이 방안을 비추고 있었다. 희숙이 몸을 가리고 있던 수건을 치우자 창문 빛이 희숙의 나신을 조명처럼 밝혀 주었다. 권지호는 이불 모서리를 걷어 들어오라는 시늉을 했다.

희숙은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랐지만 권지호는 느긋했다. 희숙의 몸은 마치 폭풍우로 외딴섬 해안가에 고립된 조각배 마냥 속수무책이었다. 징벌적 권력 앞에서 성적 자기 결정권은 무의미했다.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방법은 없었다. 약자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맞서겠다는 충동을 버린 지 오래였다.

네가 원한다면, 내가 무너지는 걸 보고 싶다면 그렇게 해 주마. 네가 해 달라는 대로 해서 성취할 무엇이 있다면 그렇게 하마. 희숙은 이를 악물었다. 그게 몇 시간 전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권지호와 함께 태연하게 파스타를 먹고 있는 자신을 희숙은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었다.

권지호는 일주일에 한 번씩 희숙을 로얄장 207호로 불렀다. 그는 항상 먼저 샤워를 마친 후였고 맥주와 안주를 준비했다. 그가 희숙을 다루는 방법은 변태섭과 달랐다. 좋은지 안 좋은지 수시로 물었고 어느 곳을 애무해야 희숙이 반응하는지 기억했다. 부드럽게, 천천히.

그렇다고 권지호가 실험적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온갖 새로운 방법의 체위를 시도했고 섹스에 상당히 공을 들였다. 권지호는 희숙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그녀의 몸에 자부심을 갖도록 유도했다. 굴욕이라 느꼈던 섹스에 차츰 희열을 느끼는 자신이 저주스러웠지만 희숙의 몸은 의지와 상관없이 두 갈래로 길들고 있었다. 변태섭이 희숙에게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신의 욕정을 푸는 데 몰입하는 반면 권지호는 언제나 희숙의 의사를 물었다.

그러나 권지호 자신의 의지대로 섹스를 풀어 갔다. 미국 포르노 비디오엔 이런 장면이 나오는데 저렇게 해야 여자들이 오르가즘에 도달한다는 둥 일본 포르노에서 등장하는 실험적 체위가 유행이라는 둥, 장면 하나하나를 묘사하며 시도해 보길 원했다.

반면 변태섭은 얼굴에 사정하기도 하고 가슴 사이에 자신의 그것을 끼워 놓고 피스톤 행위를 즐기기도 했다. 변태섭은 부카케와 프리즈리할 때 가장 흥분된 표정을 지었고 숨소리도 거칠었다. 권지호는 실험적인 섹스를, 변태섭은 가학적인 섹스를 원했다.

결국은 그랬다. 권지호는 매번 사정하는 순간 희숙에게 물었다. 이번엔 어디다 할까. 안에, 배에, 손에, 가슴에, 입에? 허망하고 모욕적인 굴종이었지만 굴종의 열매는 달콤했다. 권지호는 야근조에서 희숙을 자주 제외해 주었다. 그러나 특혜처럼 보이지 않도록 같은 조 다른 직원을 묶어서 조치했다. 또 자신의 개인 비서처럼 일을 시키곤 했는데 이 역시 서류 업무를 희숙이 제일 잘하는 것처럼 떠벌인 후라 직원들은 별다른 눈치를 채지 못했다. 권지호는 희숙의 위장 취업을 첩보영화에 나오는 스파이처럼 보호하고 감춰 주었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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