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77]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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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4-03 06:30:43

하루는 권지호가 정사 후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내며 말했다.

“금화, 미국 유학 안 다녀올래? 미국 다녀와도 별 볼 일 없는 애가 있고 다녀와서 인생이 확 달라지는 애가 있거든. 내가 보기에 금화는 후자야.”

미국 유학이란 말에 희숙은 재학 시 교내 학생 게시판에 미국 자매학교 교환학생 모집 공고를 본 기억이 되살아났다. -미국 유학, 비전을 드립니다- 그러나 변태섭이 “타락한 매판 자본주의 국가 미국에 가서 공부하느니 프랑스로 가서 민주주의를 제대로 배우고 오겠다, 프랑스야말로 성공한 사회주의 국가다”고 말한 이후로 기회가 된다면 프랑스에 유학하겠다 마음먹었다. 프랑스로 변태섭과 함께 유학 가는 게 희숙의 버킷리스트였다.

“프랑스 유학은 어때요?” 희숙이 하얗고 봉긋한 가슴을 드러낸 채 머리에 팔을 괴며 권지호를 향해 몸을 틀었다. “거기서 뭘 배우게. 배울 거 하나도 없어. 갈 거면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로 가. 독일이 패전국이라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은 그 시기에 가장 발전한 국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어. 당시 오스트리아는 학문과 예술의 중심이었거든. 프로이트도 거기서 나왔고. 오스트리아 경제학파가 등장한 것도 그 시기였으니까. 암튼 난 학문의 중심지는 오스트리아라고 생각해.”

희숙은 권지호에게 프랑스 혁명으로 자유·평등·인민 주권의 질서가 확립되었고 근대 민주주의의 기원이 이루어지면서 정치도 성장하게 되었다고 변태섭에게 들은 말을 자기 생각처럼 흘렸다. 권지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독일 공산당이 전멸하면서 유럽 좌익의 핵심이 프랑스가 된 거고 그러면서 전 세계 좌파를 수출하는 수출국이 된 거지. 무슨 민주주의의 기원이야. 사회주의를 꿈꾸는 사람들이 프랑스를 거쳐 러시아로 가게 된 것뿐이고. 암튼 그건 세계사적으로 보면 엄청 멍청한 짓이었어. 근데 말이지 좌익 공부하겠다는 사람들 말야, 러시아가 사회주의 본거지인 거 알면서 러시아로 가는 건 원하지 않았어. 왜 그랬을까. 러시아가 잘살아야 갈 맛이 날 텐데 못 사니까. 결국 사회주의 배우겠다는 명분으로 프랑스·스웨덴·노르웨이·오스트리아 같은 나라로 가서 살길 희망한 거지. 중국도 마찬가지고. 레닌이즘·마오이즘이 태동한 나라에 가서 배우든 말든 해야 하는데 거지꼴하고 있는 나라는 가기 싫은 거지.”

권지호는 벌거벗은 채로 일어나 벽에 걸린 자신의 외투를 더듬었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희숙에게 다가왔다. 희숙에게 담배 한 개를 건넸다. 엉겁결에 희숙은 그가 내민 담배를 받아들었다. 권지호의 태도는 자연스러웠다. 희숙이 담배를 피우는지 피우지 않는지 묻지 않았다. 권지호가 이미 희숙의 많은 부분을 눈치채고 있다고 생각했다. 권지호는 로얄장 상호가 찍힌 성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방에 던져 버리고 외투 안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가져와 담배에 불을 붙였다. 희숙의 것에도 불을 붙였다. 희숙은 담배의 뻘건 몸뚱이가 드러날 때까지 여러 번 연기를 빨아들였다. 권지호는 폐 속 깊이 들어갔다 나온 연기를 길게 품어내면서 말을 이어 갔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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