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74] 선수들의 비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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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3-31 06:30:44

떡볶이를 앞에 두고 권지호는 말했다. 자기 이거 알아? 노동자들이 뭉쳐서 자본가들을 상대로 임금·노동 시간·노동 조건 등에 대해 요구하는 상황이 점차 확산됐잖아. 그러면 자본가들도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에 뭔가 대응해야 할 거 아냐. 막말로 자본가가 나 못 살겠다, 공장 안 할래 하면 누구 손해겠어, 국가지. 그래서 국가가 법을 제정한 거야. 조직적인 노동자들 활동 저지하려고 1779년에 영국 최초로 제정된 법이 ‘조합법(Combination Act)’이야. 이런 건 당연히 알았을 거고. 암튼, 그렇다는 얘기야. 이 정도면 희숙의 신분이 들통났다는 얘기였다.

“저한테 전공이 뭐냐고 왜 물어봤어요? 검정고시에 전공이 어딨어요?”

떡볶이를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떡볶이 양념이 입가에 잔뜩 묻었다. 설령 권지호가 눈치챘다 해도 그냥 던진 말일 수도 있었다. 권지호가 살살 웃으며 말했다.

“자기는 다 좋은데 자기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더라. 걱정은 마, 노동조합 만드는 거 눈감아 줄 테니. 나는 너 눈감아 줄 생각인데, 너는 나한테 뭐 줄 건데? 비즈니스라면 비즈니스로 해 두자, 피차 선수끼리.”

희숙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왕 들통난 거 여기서 더 아닌 척 우겼다간 망신당하고 쫓겨나겠다 싶었다. 아니, 그런 염려보다는 호기 있게 정면 돌파로 대처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뭘 원하시는데요?”

권지호는 나중에 쪽지 줄 테니 거기서 보자고 했다. 신기했다. 희숙은 위장취업이 들통난 상황에서 담담할 수 있었던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 권지호가 희숙의 존재를 알면서도 눈감아 준다고 한 이유에 대해 굳이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권지호가 뭘 요구하든 눈감는 대가는 치욕일 것이고 어차피 갑을 관계에서 동등한 비즈니스란 없을 거니까. 희숙은 이미 저항할 뜻을 버리고 그의 요구에 어떤 반감이나 조건 따윈 제시하지 않으려 마음먹었다. 그러나 권지호는 열흘이 넘도록 그녀를 찾지 않았다.

담담하게 받아들이자 했던 처음의 결심도 시간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자 초조함으로 바뀌었다. 권지호는 때론 전보다 친절하면서 때로 전보다 무심했다. 매도 빨리 맞으면 좋으련만 무슨 대단한 비즈니스라고 뜸을 들이는 건지 아니면 덮고 가려고 그가 배려하는 건지 추측하기 어려웠다. 노조 설립을 마친 사업장들이 주변에서 빠른 속도로 늘어났고 희숙이 준비하는 일월의 노조 설립도 연말 안으로는 가능할 것 같았다.

희숙은 잔업이 끝나고도 남아서 일했다. 화장실 청소도, 마룻바닥 닦는 일도, 잔업 정리도 도맡았다. 혹시 열심히 일하면 아무 대가 없이 눈감아 줄 수도 있겠지. 실낱같은 희망이지만 권지호의 태도에서 그 희망은 가능성으로 굳혀졌다. 보름째 되는 날, 권지호가 책 한 권을 들고 작업 중인 희숙 곁에 나타났다. 어이 고구마,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거 읽고 싶다면서. 집에 가서 찾아보니까 없더라. 내가 읽은 후에 누굴 빌려준 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이 안 나더라고.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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