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어려운 사람들이 문득 생각나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임대아파트에서 나왔어요. 의원이나 하는 양반이 세금으로 월급 타 먹으며 임대아파트에서 산다는 소리를 듣는 게 참으로 미안하더라구요. 아파트에서 나오고 나니 통장에는 3000만원 남짓이 있었어요. 그동안 월급 타면 암투병하는 탈북민들과 장애인들, 대학을 다니는 청년들에게 조금씩 주고 그랬죠. 나 혼자의 것보다 우리의 것이 저는 더 좋아요. 그게 더 기쁘고 행복하더라구요. 우리 탈북민들이 대한민국의 당당한 국민이 될 때 우리가 북한 정권과 주민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강렬하다고 생각해요. 탈북민도 장애인도 대한민국에선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는 그 평등과 정의, 자유를 말이에요.”
한낮의 더운 공기가 아스팔트와 만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던 여름날 스카이데일리 취재팀은 서울 여의도 국회로 향했다. 바로 오늘의 주인공 지성호 국민의힘 의원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지성호 의원은 북한 출신 국회의원이다. 1982년 함경북도 회령시 학포탄광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6.25전쟁 이후 잡혀온 국군포로들로 이뤄진 이 탄광 마을은 북한에서도 혁명화 단계를 넘은, 소위 적대세력을 강제노동시키는 거주구역이었다. 마을 가까이에는 정치범 수용소까지 있어 매일 폭력과 죽음이 오가는 지옥과도 같은 곳이었다.
1997년 북한은 ‘고난의 행군’이라는 경제위기에 봉착한다. 300만명이 넘는 북한 주민이 아사했고, 도시마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완전히 붕괴되면서 배급으로 살아가던 북한 주민들은 무더기로 죽어나갔다. 지 의원도 어려웠던 그 시기 사랑하는 가족을 하나 둘 떠나보내며 배고픔을 견뎌야 하는 비참한 삶을 하루하루 살았다.
“고난의 연속, 팔과 다리 잃고 선택한 한국행… 대한민국 국민에 감사해”
“제가 살던 곳은 국군포로들이 살던 탄광촌이었어요. 그곳에는 정치범 수용소가 있었죠. 북한 정권은 이곳에 혁명화 계층과 계급투쟁의 대상들을 모아놓고 강제 노동과 착취를 일삼았어요. 사실 북한에서 평양냉면 한 그릇 먹어본 적 없어요. 식량이 없어 매일 나물을 캐먹고 살았고 통행증 하나 발급받지 못해 탄광마을을 벗어나 본 적도 없었어요. ‘고난의 행군’ 시기엔 할머니가 굶주림에 돌아가시는 모습까지 보게 됐죠.”
지 의원은 이런 고초를 겪으면서도 가족과 함께 어떻게든지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근육도 생기지 않은 어린 나이여서 일자리마저 없었지만, 목전에 닥친 생계 위험은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밤이면 역으로 나가 탄광에서 나가는 석탄열차에 올라 석탄을 훔쳐야만 했다. 그러다 움직이는 열차에서 떨어져 팔과 다리를 잃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당시 하루 한 끼를 걱정해야 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앞뒤 가릴 여지가 없었어요. 매일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아사했고, 그런 광경이 어린 저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죠. 친척들도 굶어 죽는 모습을 보며 어떻게 하든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그래서 탄광에서 나가는 열차에 오른 거죠. 그런데 경험이 없고 어리다 보니 석탄열차에서 떨어져 사고를 당하고 말았어요. 내 팔과 다리를 화물열차가 밟고 지나가는 상황을 눈뜨고 보다 기절했던 것 같아요.”
“이후 병원으로 실려 갔지만 마취제도 없이 수술을 받아야 했는데,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수술 이후에도 항생제가 없어 썩어가는 다리를 붙잡고 긴 나날을 고통 속에서 견뎠어요. 그렇게 질기게 목숨이 연명됐죠. 하지만 비참한 인생이라 저는 또다시 달리는 열차에 올라야만 했어요. 군인들이 쫓아오면 항상 먼저 잡혀 구타에 시달렸고, 목발은 부서져 나갔어요. 피범벅된 얼굴과 다리 하나로 몸을 지탱하며 겨우 집에 오면 그 서러움에 온몸을 눈물로 적셨어요. 참으로 비참하기 짝이 없던 시절이었죠.”
지 의원은 그러한 삶을 살면서 북한 정권의 악행과 부조리를 몸으로 경험하게 된다. 죽었다 살아난 그는 두만강 너머에 있는 중국이 부러웠다. 그곳에 가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무작정 목발을 짚고 강을 건넜다. 이후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방법을 찾아낸 그는 또 다시 수천km를 목발에 의지해야만 했다.
“중국을 거쳐 베트남, 라오스, 태국까지 이어진 긴 여정에서 항상 북송될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어요. 위험이 엄습하면 다들 도망치지만 저는 몸이 성치 않아 그럴 수도 없었죠. 그냥 허공에 대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어요. 누더기 옷이라도 갈아입으려고 괴나리봇짐을 허리에 두른 채로 그렇게 지구 3분의 1을 돌아 한국에 오게 됐어요.”
2006년 무렵 태국에 도착한 지성호 의원은 방콕의 수용소에서 장애인이란 이유로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 입국하게 된다. 그는 드디어 가난에서 벗어나게 됐다는 기쁜 마음을 안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가 도착한 인천공항은 30년의 시공간을 이동한 것 같은 미래 도시였다고 했다.
“인천공항에 내리니 휠체어를 가지고 대기하는 관계자분들이 있더라고요. 휠체어란 단어를 모르던 제가 처음으로 휠체어를 타게 된 거예요. 정말 감격했어요. 그런 가운데서도 인천공항을 보고 입이 쩍 벌어졌죠. 공항 바닥에 깐 대리석이 고향의 우리집 마룻바닥보다 더 좋아보였으니까요. 정말 꿈 같은 순간이었어요.”
지성호 의원은 국정원과 하나원을 거치며 의족과 의수를 국가로부터 지원받았다. 그는 평생 원하던 새 팔과 다리로 다시 땅을 딛게 되자 감격해서 울고 또 울었다. 그렇게 한국 사회에 나온 지 의원은 과거 북한에서 못 먹었던 고기들을 마음껏 먹었다면서 에피소드도 쏟아냈다. 그리고 기회의 평등이라는 가치를 알게 됐고, 장애인과 약자가 보호받는 대한민국이 정말 좋은 국가라는 것을 느끼게 됐다고 했다.
“의수와 의족을 끼고 땅에 첫발을 내딛던 순간을 잊을 수 없어요. 너무나 감격스러웠죠. 내 팔과 다리를 빼앗은 북한 정권을 향해 목발을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이 모습을 고향 사람들이 보면 얼마나 기뻐할지 생각하며 새 삶에 대한 희망에 부풀었죠. 사실 처음 사회에 나왔을 때 북한에서 못 먹던 고기를 마음껏 먹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그래서 충주 시골의 돼지 도축장에 가서 싼 가격으로 자투리 돼지고기를 매일 사다 먹었던 것 같아요. 아마 그때 돼지 한 마리는 먹은 듯해요.”
지 의원은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동안 시간이 흐르면서 자유와 평등을 알게 됐다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대한민국 국민의 지식 수준이 높다는 것을 체감하고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다. 이 소중한 자유와 평등을 누리려 해도 배움 없이는 다 알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무작정 컴퓨터 교육을 하는 직업학교를 찾아가 입학시켜 달라고 떼를 썼다고 했다.
“아마 컴퓨터 학원 선생님들이 놀랐을 거예요. 북한 사투리를 쓰는 청년이 와서 무작정 컴퓨터를 배우고 싶다고 하니 어이가 없는지 아무 말을 못 하시더군요. 그래서 저는 북한에서 내려온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밝히고 주민등록증을 내보였죠. 그제야 학원 원장님이 웃으시며 국가 지원으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시더라구요. 제가 생각해도 참으로 가관이었어요.”
그는 그렇게 컴퓨터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다. 알아듣기 힘든 전문용어들이 나올 때마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주변에 앉은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또 물어봤다. 그러나 돌아서면 또 잊어버려서 다시 물어보기를 수백, 수천번을 거듭했다고 한다. 낮에는 공부, 밤에는 포장마차에서 호떡과 어묵을 팔며 생계를 이어나갔지만 힘든 줄 몰랐다. 이후 주변의 권유로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상경한 그는 대학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임대아파트에서 살 때 옆집 할아버지가 여기서 이러지 말고 서울 가서 공부하라고 하시더라구요. 저도 공부에 대한 욕구 때문에 상경을 결심했고, 서울에 와서 대학진학을 위한 공부에 뛰어들었죠. 몇 년을 그렇게 공부한 끝에 드디어 대학에 입학하게 됐어요. 잠도 안 자고 공부하면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항상 열심히 살았던 것 같아요.”
대학에 입학한 지 의원은 북한군에 의해 천안함이 폭침된 사건을 전해듣고 미안함에 등교하기가 힘들었다고 전했다. 북한 정권이 한 일이긴 하지만 북한에서 태어난 자신에게 그 책임을 물을까 더럭 겁이 났다고 한다. 그 마음의 짐을 항상 짊어지고 조금이라도 그들의 희생에 조의를 표하고 싶어 그는 해마다 6월이 되면 서울국립현충원을 찾아 봉사활동을 한다.
“어느 날엔가 천안함이 북한 공격을 받았다는 뉴스가 나오더라구요. 북한 정권이 너무 저주스러웠어요. 학교에 가면 그로 인해 다들 저를 싫어할 수도 있다는 막연한 생각까지 들었죠. 하지만 학우들은 그런 내색 없이 평상시처럼 저를 대해줬어요. 그래도 지금도 마음 한 켠에 미안함이 가득하죠. 물론 제가 저지른 악행은 아니지만 저런 정권 밑에서 살았다는 게 죄책감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현충원을 자주 찾아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들과 호국영령들께 인사하고 봉사활동을 하고 있어요. 올해 6월에도 남북한 출신 청년들로 묶어진 유닛 와이(Unit Y) 청년정책자문위원단과 함께 현충원을 찾아 봉사활동을 하고 왔죠.”
“고단한 인권운동가의 삶… 10년간 약 500명의 탈북민을 구출했죠”
대학을 졸업한 지 의원은 이후 북한 정권에 대한 반항심이 커져갔다.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지키고, 중국에 있는 탈북여성들의 인권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남북한 청년들과 함께 나우(NAUH)라는 인권단체를 만들었다. 중국과 제3국에서 고통받는 탈북민들을 구출하며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인권운동가의 길을 걷게 됐다.
“사실 중국에 있는 탈북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캠페인을 진행하다가 그들을 구출하자는 팀원들의 의견에 탈북여성구출 모금활동을 진행했어요. 다들 20대, 30대 청년들이어서 과연 그렇게 큰일을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을 했지만 한 분 두 분 데려오다 보니 500명 가까이 되는 분들을 구출할 수 있었죠. 한 사람의 목숨이라도 북한 정권에서 살려오기 위해 발버둥쳤던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지 의원은 인권운동가로 살면서 북한 주민들의 비참함을 더 많이 느꼈다고 했다. 진보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버림받는 탈북민들은 그 누구의 보호도 없이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한성옥 모자의 아사 사건, 북한 어부들의 판문점 강제북송 같은 사건들이 벌어질 때마다 힘이 없어 그들을 지키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그러다 국제사회에 호소해보자는 생각으로 미국과 영국 등 유럽국가들을 돌며 북한주민들의 인권과 탈북민들의 인권을 알리는 활동을 했다.
“한성옥 모자 아사 사건이나 탈북 어부 판문점 강제북송도 사실 우리가 관심만 있으면 막을 수 있는 일들이었어요. 하지만 그 누구도 발벗고 나서지 않았죠. 인권활동가들의 국제회의가 있을 때마다 미국과 영국 등 전 세계 지도자들을 직접 만나 호소했어요. 조지 부시 전 대통령, 지미 카터 전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등 전직 대통령만 해도 세 명을 만났고, 그 외 다른 나라 국가 수반들도 만나 탈북민 인권을 호소했죠.”
그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그렇게 뛰고 또 뛰었다. 그러다 정치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당시 지 의원은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힘이 없으면 탈북민은 물론 장애인과 약자를 보호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그는 정치인이 될 결심을 한다.
“국회의원이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어요. 북한에서 특권 계층에 있었던 사람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대한민국에 정치세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죠. 탈북민 구출이라는 그 사명감으로만 살아오던 저에게 그렇게 정치의 길이 열렸어요. 인권활동을 내려놓으면 이들을 어찌할까 한동안 고민했지만 국회의원이 되면 더 많은 사람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생각에 결심을 하게 됐죠. 그렇게 저의 정치 인생이 시작됐어요.”
지 의원이 국회의원이 된 지 갓 1년이 지났다. 그는 여전히 정치인의 모습보다도 성실하고 열정적인 인권운동가의 모습 간직하고 있다. 그는 장애인이지만 역경을 딛고 일어섰고, 그래서 품어준 대한민국이 더 고맙다고 말했다. 북한의 적대계층에서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었고, 한편으론 국민의 신임이 있었다. 국민이 부여한 힘과 책임감을 자양분 삼아 오늘도 지 의원은 약자를 위한 인권운동가로서 열심히 뛰겠다는 다짐을 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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