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알아차림’을 익힌 사람과 그것을 익히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는 시대가 되지 않았을까. 사회적 ‘분노 에너지’의 역할이 바뀐 때문이다. 우리에게 분노는 한때 타국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가난을 무찌르는 데, 중동 특수로 외화를 벌어들이는 데, 민주화 운동으로 나라의 주인을 똑바로 세우는 데 폭발적인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가난과 독재가 국민적 분노의 불꽃를 당겨서 연금술처럼 세상을 바꾼 것이다.
2017년 이후 국민소득 3만불 시대에 이르면서 대한민국을 타오르게 했던 집단 ‘분노’는 은연중에 각자의 몫이 된 듯하다. 정치·복지·노동·교육 문제에 대해 한바탕 일치단결하는 데 별 문제 없었던 분노 에너지의 집중력이 떨어진 걸까. 그만큼 개인화·파편화의 골이 깊어진 탓도 있을 것이다. 이유야 무엇이든, 각자 도생이 정답 같은 세상이다. 화를 내거나 눌러참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지만 받아든 개개인이, 외롭게 남은 듯하다.
화를 내거나 눌러 참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지라니! 한 마디로 ‘분노조절 장애’거나 참는 습관 때문에 ‘치매나 암에 노출되는’ 천덕꾸러기라는 말 아닌가. 이쯤되면 ‘나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 ‘묻지마 범죄’ 같은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분노가 그림자처럼 내면화되는 흐름은 분명하다. 이유 없는 폭력이나 짜증, 우울 따위가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지 않은가.
명상이나 심리 프로그램 안에서 일반화되고 있는 ‘알아차림(마음챙김)’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분노 아니면 억압’이 아닌 제3의 길, ‘알아차림’이라는 출구를 만들어야 한다.
아들이 밥을 먹고 제 방으로 들어간다. 그 식탁에 눈이 갔다. 갑자기 정수리가 덜컥 열리는 듯하면서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이 녀석이 원!’ 수저에는 짓이겨진 밥알이 붙어 있고, 흐트러진 반찬 그릇 옆에 마시다만 물잔이 놓여 있다. 밥 숟가락 놓고 뒤도 안 돌아본 형국이다. 나는 아들이 들어간 방문을 쳐다보면서 가쁜 숨을 가다듬는다. 지금 이 감정으로 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될 게 뻔하다.
그렇다고 참고 있자니 나 자신부터 설득하기 힘겹다. 서른이 다된 성인 아닌가. 이런 태도로 직장에서는 사람 노릇이나 하고 지낼까. 안 봐도 뻔할 뻔자다! 온갖 망상·감정들이 불불이 뒤섞인다.
이런 그림, 그다지 드물지 않다. 가족이래야 고작 서너 명이 전부인데 그 안에서 밀생하는 생각·감정들은 쑥대밭이 무색할 지경이다. 직장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약간만 유리한 입장이면 티 안나는 갑질은 예사고, 비아냥대거나 비꼬거나, 반말인지 온말인지 모를 언사로 심사를 뒤트는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진다. 말 그대로 조용한 전쟁터. 현란한 심리전과 미묘한 언어 공방전이 평온한 표정 가면을 녹일 듯이 들끓는다.
단 한번만이라도 성질대로 냅다 내던지거나, 화산처럼 통렬히 폭발할 수 있으면 속이 후련하련만. 이러다가 대인 지뢰처럼 나도 모르게 폭발해서 내 발목 자르는 건 아닐까. 이런 걱정 때문에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습관만 생겼다. 내 속내가 저 치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평탄면에 살면서도 때없이 가파른 것이 인간관계다. 화가 나면 화가 나는 대로 가파르고, 눌러 참으면 눌러 참는대로 헐떡이게 된다.
분노 감정을 통제하는 건 정말 어렵다. 태국·미얀마·스리랑카·인도 등지에서 10여년 간 출가수행 후 집으로 돌아온 유명 심리학자 잭 콘필드는 얼마가지 않아 옛 여자친구와 다투고, 일터인 병원에서도 격렬하게 분노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10여년 간 지순하게 지켜왔던 수행자 상(相)이 한 순간에 물거품 됐다. 당혹감 속에서 그는 자신의 과거가 환상임을 인정한다. 그런 후 그가 찾은 대안은? ‘지금 여기’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일’이다. 이것이 전부였다.
손을 뻗으면, 손을 뻗고 있음을 알고, 물을 마시면서 꿀꺽 입안으로 들어가는 물의 소리, 감촉을 아는 일이 그가 찾은 대안이었다. ‘알아차림’은 초보 명상가가 대체로 첫날 익히거나 듣게 되는 ‘언어’이자 ‘행위’다. 그런데 잭 콘필드 이 분이 다다른 곳도, ‘알아차림’이다. 심리학 박사 과정을 마친 후 10여년 간 출가자로서 온갖 명상과 수행의 경지에 다다랐음을 인정받은 명상 고수도 그 긴 시간을 거쳐 ‘알아차림’으로 돌아온 것이다. 화가 나면 마음속으로 ‘분노, 분노, 분노’라고, 자신을 주시하면서 이름을 불러 주는 일.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먼 나라, 긴 시간’ 속에 있지 않다. 늘 이렇게 ‘지금 여기’에 있다. _()_
후원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