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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제정치체계는 격변의 한가운데에 있어요. 우리나라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던 ‘규범에 기초한 국제질서’가 도전 받는 상황이죠. 이는 우리의 안보와 경제에도 매우 심각한 문제예요.”
버락 오바마와 도널드 트럼프라는 정치 거물들이 미국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 4년 5개월간 주미대사로 재직하며 한국 대미외교의 현장 사령탑으로 일했던 안호영 경남대 석좌교수는 우리 외교에서 현실적으로 더 이상 ‘전략적 모호성’은 통하지 않는다고 일갈했다.
국제관계에서 우리의 기본 이념인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분명한 입장 표명을 회피하고 단기적 이익에 따라 대응하는 태도로는 지난 수년간 경험한 것처럼 미국의 신뢰를 잃고, 동시에 중국의 불신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난해 말 윤석열정부는 ‘자유·평화·번영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발표했어요. 특히 ‘규범과 규칙에 기반한 질서’를 강조함으로써 자유·법치·인권 등의 가치에서 뜻을 같이하는 국가들(like-minded states)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연대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죠.”
윤 정부 ‘인태전략’ 시대에 맞는 선택
안 교수는 정부의 이러한 인·태 전략은 시의적절한 것이며 일각에서 이를 미국 일변도라고 비난하는 것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국제정치체계의 변화에 눈감은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정부가 내놓은 인·태 전략은 사실상 구상 초기부터 미국과의 협력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의 인·태 전략에서 가장 취약한 요소는 미국과 갈등을 빚고 있는 중국과의 관계 설정이었다.
정부는 ‘포용·신뢰·호혜’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중국을 배제하려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미국의 정책에 적극 동조하고 있기 때문에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인 중국과의 외교를 어렵게 할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로 최근 이러한 한‧중 간 갈등이 수면 위로 불거지기도 했다.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는 지난달 8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회동한 자리에서 미리 준비한 A4용지 5장 분량의 원고를 꺼내 15분 동안 읽으며 “중국의 패배에 베팅하는 이들은 나중에 반드시 후회한다”며 정부의 ‘미국 중시’ 외교에 대해 불만을 드러냈었다.
하지만 안 교수는 “지금 겪고 있는 한‧중관계 경색은 우리보다 중국에 그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한‧중관계 개선은 우리나라의 지정학‧지경학적 현실에서 꼭 필요하죠. 하지만 우리나라의 기본 가치, 상호 존중, 호혜의 원칙 위에 관계를 발전시켜야 해요. ‘전략적 모호성’은 지난 몇 년간 경험했듯이 답이 될 수 없어요. 일례로 중국은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THAAD)배치에 가혹한 보복으로 대응했죠.”
안 교수는 이럴 때일수록 우리의 존립 기반인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 추구와 현실적인 경제적‧지정학적 이익을 조화시켜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건 우리뿐만이 아니라 다른 주요국들도 비슷한 상황이라며 탈냉전 30여 년간 교류는 활성화되었고, 그렇기에 갑작스러운 변화는 모두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라고 진단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도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연설에서 자유민주주의 수호의 결연한 의지를 밝혔지만 그해 11월 대규모 경제인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비슷한 행보를 보였어요. 우리나라도 의연하게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지키면서 현실적인 경제적‧지정학적 이익을 조화시켜 나가야죠.”
외교에 선입견은 금물
1956년 부산에서 태어난 안 교수는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경기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외교학과 3학년 때 제11회 외무고시에 합격한 그는 1978년 외교통상부(현 외교부)에 들어간 뒤 2018년 퇴임하기까지 40여 년간 직업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직업 외교관 외길 40년을 지낸 안 교수에게 외교관이라는 직업을 선택한 이유를 묻자 “고등학생 때 어떤 직업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며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었고 그중 가장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게 외교관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어린 시절 다방면으로 책 읽기를 좋아했다고 밝혔다. 까까머리 학생 시절 도서관에서 김찬삼이라는 사람이 쓴 세계 여행기를 감명 깊게 읽으며 문득 바깥세상이 궁금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회상했다. “당시에 굉장히 앞서나갔던 분이셨죠. 1960년대, 먹고 살기 힘들던 시절에 김찬삼을 통해 한국 밖의 넓고 신비한 세계를 알아 갔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2‧3학년 선배들을 제치고 교내 영어경시대회에서 수상할 정도로 영어 실력이 뛰어나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외교관 하면 잘할 것 같다는 격려를 받은 게 기억에 남는다며 웃었다.
당시 영어를 유독 잘할 수 있었던 비결을 묻자 중학교 때 기초교육을 잘 받아 이후 영어회화 동아리에서 친구들과 즐겁게 공부했고 틈틈이 서점에 들러 어렵지 않은 단어로 구성된 영어 원서를 사서 꾸준히 읽은 게 도움이 됐다고 귀띔했다.
안 교수는 외교관으로서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다. 그가 지금까지 쌓아 온 경력들을 열거하자면 숨이 가쁠 정도다. 외교관 시절 통상 3과장‧통상법률지원팀장‧다자통상국장‧통상교섭조정관 등 통상 분야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주(駐)벨기에·유럽연합 대사를 지낸 뒤 2012년에는 외교통상부 1차관에 발탁됐다.
2013년 박근혜정부 출범 후 주미대사에 임명돼 그해 6월부터 2017년 10월까지 무려 4년 5개월 동안 주미대사직을 수행했다. 이는 박정희정부 시절 김동조 주미대사가 6년(1967~1973년)가량 직을 수행한 이래 최장 기록이다. 외교부 퇴임 후에는 경남대 석좌교수로 재직하며 북한대학원대 총장을 지냈다.
“퇴임 후에도 전직 외교관으로서 우리나라의 외교안보 정책에 도움이 되는 활동을 할 수 있기를 바랐죠. 다행히 그 소망이 이뤄져 하루하루 충실히 보내고 있어요. 그게 현재 삶의 활력소예요.”
그는 외교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을 우리나라 이익과 상대국 입장에 대한 철저한 이해라고 말했다. 이에 기초해 메시지를 도출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게 외교의 본질이라고 설명했다.
“외교관에겐 ‘내가 상대방 입장이라면 어떨까’란 사고방식이 언제나 필요해요. 외교 관계를 굳건히 유지하려면 서로의 행동 동기를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하죠. 외교는 모든 걸 객관적으로 보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영원한 내 편’은 없어요.”
안 교수는 우리 사회를 바꿔 나가야 할 젊은이들이 큰 좌절감을 느끼는 작금의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헬 조선’이라는 말과 이러한 말에 공감하는 젊은이들을 생각하면 기성세대로서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그에게 젊은 세대를 위한 조언을 구했다.
“우리 세대와 비교할 때, 요즘 젊은 세대는 훨씬 큰 좌절감을 느끼는 것으로 보여요. ‘헬 조선’이라는 말, 이러한 말에 공감하는 젊은이들을 볼 때 마음이 아프죠. 그러나 헬 조선은 일제강점기 때의 젊은이들이나 전쟁‧범죄‧경제 붕괴‧폭력적 집단의 정권 장악 등으로 국가조직이 붕괴된 시리아 같은 사회에서나 할 수 있는 이야기예요. 대한민국은 모든 면에서 세계 10위권 이내에 드는 성공 국가죠. 이런 나라에 살면서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요. 한 번뿐인 인생, 불평으로 허송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것이죠. 불평이 아니라 노력만이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걸 명심했으면 좋겠어요.”
프로필 △1956년 부산 출생 △경기고 졸업 △1977년 외무고시 합격(11회) △1979년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조지타운대 국제정치학 석사 △1993년 외무부 국제협약과장 △2004년 재정경제부 경제협력국장 △2010년 외교통상부 G20 대사 △2012~2013년 외교통상부 제1차관 △2013~2017년 주미 한국대사 △2018년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 △경남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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