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Talk] 용비어천가 뺨치는 ‘명비어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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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정치전문기자 기자페이지 + 입력 2023-11-09 00:02:30

“해동 육룡이 나르샤 / 일마다 천복이시니 / 고성(古聖)이 동부(同符)하시니.”

용비어천가는 세종 27년(1445년) 권제‧정인지‧안지 등이 임금에게 지어 올린 서사시이자 최초의 한글 시가다. 목조 이안사·익조 이행리·도조 이춘·환조 이자춘·태조 이성계·태종 이방원 등 여섯 대의 행적을 노래했다.

흔히 용비어천가는 조선 왕가 여섯 대의 업적을 찬양하는 작품으로만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용비어천가는 임금이 갖춰야 할 덕목도 명시하고 있다.

바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위해 힘써야 나라가 더욱 굳건해진다’는 125장 구절 등이 그것이다. 해당 구절은 경천애민(敬天愛民)할 것을 강조한다. 민심이 곧 천심이라 했으니 민심이야말로 받들어야 할 궁극적 실체인 것이다.

조선 왕조는 일종의 왕권신수설을 신봉한 절대왕권 체제인 듯하지만 사실상 학자·관료의 순환체인 사대부가 임금의 독선을 견제했고 그런 이념이 ‘사관’들을 통한 제어에 녹아 있다.

실례로 태종 때의 사관 민인생은 태종이 낙마한 뒤 “기록하지 말라” 명령하자 “주상께서 낙마 사실을 적지 말라고 명령하셨다”고 태종실록에 써 넣었다. 자연히 역대 임금들은 몸가짐을 조심하며 오만에 빠지는 걸 스스로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2023년 대한민국 정계에서 조선시대 때보다 못한 분위기를 보며 아연실색하게 된다. 곳곳에서 때 아닌 ‘용비어천가’, 아니 권력의 자기정당성만 주장된 ‘반쪽 용비어천가’가 울려 퍼진다. 이재명 대표의 사당화 의혹에 휩싸인 더불어민주당이 가장 눈길을 끈다.

민주당에서는 “이재명을 중심으로 뭉친 민주 세력이 총선에서 승리해야 한다”든가, 이 대표의 리더십이라면 내년 총선에서 민주당의 국회 200석 확보는 충분하다는 주장 등이 난무한다. 국민의 눈치를 살피는 대신 권력자의 눈치만 살피는 듯한 행보들이다.

앞뒤 없는 200석 압승론에 민주당 내에서도 고강도 질타가 쏟아졌다. 박용진 의원은 “국민에게 오히려 매 맞을 소리”라며 “이제 겨우 지역 예선전(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을 치렀는데 우리가 월드컵 우승할 거라고 주장하면 좀 그렇다”고 꼬집었다. 박지원 전 국정원장 역시 “대세론‧낙관론 운운, 총선 200석 확보로 윤석열정권을 무력화시키자고 하면 국민은 떠난다”며 “도취‧건방‧싸가지 언행을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심지어 친명(친 이재명)계에서조차 쓴소리가 나왔다. 김두관 의원은 “위기가 몰려오는데 200석 압승론 떠드는 정신 나간 인사들이 있다”며 “20년 집권론 떠들다 5년 만에 (문재인) 정권이 끝장난 것을 벌써 잊은 것 같다”고 쏘아붙였다.

민의를 받드는 민주당으로 거듭나기 위해 당 지도부가 쇄신에 앞장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김 의원은 “국민의힘 메가서울이 가짜든 진짜든 국민적 관심 모으기에 성공 중인 반면 민주당은 공천 탈락‧사법리스크가 두려워 혁신에도 이슈에도 침묵하면서 국민들 관심 밖으로 저만치 밀려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국민의힘 지도부 등의 험지 차출이 이미 결정돼 출마 지역도 곧 발표할 예정이라고 한다”며 “국민의힘보다 더 많은 다선의원을 험지로 보내는 ‘내 살 깎기’를 시작해야 한다.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가 앞장서야 한다. ‘친명 안방·비명 험지’로 방향 잡았다가는 100석도 못 건진다. 저를 포함한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내 원로의 솔선수범은 이미 나온 상태다. 21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을 지낸 6선의 박병석 의원이 6일 국회의원회관 기자회견에서 내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개인보다 당, 당보다 국가가 우선이라는 초심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국회의원의 모든 게 역사에 기록된다는 두려움을 늘 간직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 대표는 당 안팎의 준엄한 목소리에 귀기울여 시대역행적 ‘명비어천가’를 앞장서서 지양해야 한다. 국민 눈치 살피는 야당으로 거듭나야 다당제 체제에서 정치가 정상화하고 협치도 살아난다. 그럴 때 민생은 자연히 복원될 것이다.

오주한 정치전문기자 jhoh@skyedaily.com 기자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