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쓰는 역사 [17] 비참한 전쟁의 상징 ‘검은 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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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에 걸친 소모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스카이데일리 기자페이지 + 입력 2024-06-24 10:06:03

▲ 흔히 볼 수 있는 튤립은 개량된 원예종이고 야생 튤립의 원산지는 중앙아시아 파미르고원이다. 윤상구 사진작가

튤립과 함께 어우러진 장면 중 가장 익숙한 것은 풍차가 있는 네덜란드의 전원 풍경이다. 실제로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튤립을 가장 많이 수출하는 나라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튤립은 원예종으로 개량된 품종이고 야생 튤립의 원산지는 중앙아시아 파미르고원이다. 튤립의 원래 이름은 랄레(lale)였는데 아랍 사람들이 머리에 두르는 터번처럼 생겨서 튈벤드(Tülbend)라는 별칭이 붙었다. 이것이 라틴어(tulipa)와 프랑스어(tulipan)를 거쳐 튤립(Tulip)이라는 영어 이름으로 굳어졌다.

‘터번’에서 유래된 이름, 튤립

▲ 튤립은 튀르키예 국화이며 다양한 관상용 품종을 만들어낸 나라도 튀르키예다. 윤상구 사진작가

튤립 이야기에서는 튀르키예를 빼놓을 수 없다. 튤립은 튀르키예 국화이며 튀르키예 사람들은 전통 도자기 등 예술 작품과 건축물에 튤립 문양을 많이 사용해왔다. 다양한 관상용 품종을 만들어낸 나라도 튀르키예다.

튀르키예에서 소비와 향락의 문화가 꽃 피었던 18세기 오스만 제국의 아흐메트 3세가 집권한 때를 ‘튤립 시대’라고 칭한다. 이때 아흐메트 3세는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 곳곳에 튤립을 심도록 지원했다. 그런데 아흐메트 3세를 몰아내고 즉위한 마흐무트 1세는 콘스탄티노플의 튤립을 모두 뽑아 버렸다. 튤립을 사치의 상징으로 여긴 것이다. 튤립 시대에 1500종에 이르던 품종 중 많은 종이 이때 멸종했다.

1600년대 네덜란드로 건너간 튤립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재배는 아직 원활치 않았는데 꽃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자 튤립 꽃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1630년대 유럽에서는 튤립 한 송이를 사려면 황소 25마리가 필요했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였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튤립 재배 사업에 투자했고 급기야 가격이 폭락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몬테 크리스토 백작’의 저자로 유명한 알렉산드르 뒤마는 ‘검은 튤립’이라는 소설에 이런 튤립 과열 투기 현상을 묘사했다.

러시아 예카테린부르크 시내에는 또 하나의 ‘검은 튤립’이 있다. 이는 소련 시절 치러진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 희생자를 기리는 시설이다. 바닥에 주저앉은 병사 동상과 전사자 명단으로 이뤄진 구조물은 마치 튤립 꽃잎 모양처럼 보인다. 하지만 모두 검은색으로 언뜻 보아도 무겁고 암울한 느낌이 든다.

주저앉은 병사 동상을 포함한 검은 튤립

▲ 예카테린부르크 검은 튤립에 설치된 참전 병사 동상에선 전쟁의 피로가 역력히 느껴진다. 윤상구 사진작가

아프가니스탄 전쟁 때 ‘200번 화물’이라 불린 전사자를 고향으로 옮겨 오던 수송기의 별칭은 ‘검은 튤립’이었다. 전사자 명단을 보도할 때 튤립 무늬를 테두리 장식으로 썼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러시아 곳곳에 자리한 아프가니스탄 전쟁 희생자 추모 시설마다 검은 튤립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1978년 쿠데타를 일으켜 친소 정권을 세운 아프가니스탄의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 정부는 소련에 지원을 요청했다. 브레즈네프가 서기장이던 당시 소련은 1979년 12월24일 전면 침공을 감행했다.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 도착한 소련군은 대통령 하피줄라 아민을 제거하고 새 대통령을 세웠다.

1980년 유엔총회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개입에 반대하는 결의안을 104대 18로 통과시켰다. 무자헤딘이라는 무슬림 게릴라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소련군은 철수하지 않았다. 소련은 대규모 공습을 하고 무자헤딘 반군들의 피난처가 될 만한 곳들을 파괴했으며 수백만 개의 지뢰를 매설했다. 이 전쟁에서 100만 명 내외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 수백만 명이 난민이 되었다.

강대국의 침공이라 전쟁이 쉽게 끝날 것이라 예상했지만 소련은 좀처럼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을 빼지 못했다. 전투는 아프카니스탄 영토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원정군 소련은 군사 작전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외교적 무마에도 힘써야 했다. 소련은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엄청난 규모의 군사‧외교적 비용을 지불했고 이는 소련 붕괴의 한 원인이 되었다.

독이 든 튤립 구근까지 먹게 하는 전쟁의 비참함

1989년 소련은 아무 소득도 없이 전면 철수를 결정했다. 사람들은 아프가니스탄을 ‘소련의 베트남’ 혹은 ‘곰 덫’이라 부르며 침공한 강대국의 패퇴를 비아냥거렸다. 승리한 전쟁이 아니어서인지 예카테린부르크 검은 튤립 한가운데 만들어 놓은 참전 병사 동상에선 전쟁의 피로가 역력히 느껴진다.

소련은 해체되었지만 그 뒤를 이은 러시아는 30여 년 만에 다시 이웃 나라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전장은 우크라이나이지만 러시아의 전사자들을 실어나르는 ‘검은 튤립’과 같은 수송기는 2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분주하다.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먹을 것은 없고 너무도 배가 고파서 흙을 파헤쳐 벌레까지 잡아먹었다고 한다. 쓰레기통에서 음식쓰레기를 발견하면 먹고 탈이 날 것을 알면서도 환호하며 먹었고 튤립 구근까지 캐 먹었다고 회고했다.

튤립 구근에 독성이 있어 인체에 해롭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생의 마지막 음식이 될 수도 있지만 허기의 고통을 잠재우기 위해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 그것이 전쟁 상황이다. 어떤 명분으로 시작되었든 비참하지 않은 전쟁은 없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이 하루빨리 들려오기를 소망한다.

[글 황인희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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