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쓰는 역사 [28] 저녁밥 지을 시간 알려준 ‘오후 네 시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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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델의 ‘우열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 분꽃

스카이데일리 기자페이지 + 입력 2024-09-09 09:27:59

▲ 오후 늦게 피고 다음 날 아침에 지는 분꽃은 ‘오후 네 시의 꽃’으로도 불린다. 윤상구 사진작가

분꽃은 해 질 녘에 피어 다음 날 아침에 진다. 그래서 영어로 ‘오후 네 시의 꽃(four o'clock flower)’이라고도 한다. 시계가 흔치 않던 그 옛날의 어머니들은 한여름 늦은 오후에 분꽃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저녁밥을 지었다는 말도 있다.

나팔 모양의 꽃이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피며 씨앗은 둥글고 검다. 이 검은색 씨앗 안에 흰 가루가 들어 있는데 분(粉)꽃이라는 이름은 이 흰 가루에서 유래됐다. 이 가루에는 독성이 함유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이 가루로 화장품이나 염료를 만들었다고 한다.

완두콩 교배 실험으로 유전 법칙을 정리한 멘델

분꽃의 꽃 색깔이 멘델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도 이채롭다. ‘따르지 않는다’라는 특성 때문에 분꽃은 멘델의 법칙과 더불어 유전학의 중요한 자료로 거론되곤 한다. 오스트리아의 성직자였던 멘델은 대학에서 다윈의 진화론을 접한 후 진화론을 증명할 실험을 하고자 수도원 뜰에 완두를 심었다. 그가 연구 재료로 완두를 이용한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완두가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식물이었다는 점이다.

멘델은 1856년에서 1863년까지 8년 동안 완두콩 교배 실험으로 얻은 2만9000여 개 형질 조사를 바탕으로 우열의 원리·분리의 법칙·독립의 법칙이라는 유전 법칙을 정리했다. 우열의 원리는 순종의 대립 형질끼리 교배시켰을 때 잡종 제1대에서 우성 형질만 나타난다는 원리다. 원래 ‘우열의 법칙’이라 불렸지만 ‘법칙’이라 하기에는 예외가 너무 많아 ‘원리’로 바뀌었다.

분리의 법칙은 우성만이 나타난 잡종 제1대를 자가 수분하여 얻은 잡종 제2대에서 1⁄4의 확률로 열성이 분리된다는 것이고 독립의 법칙은 멘델이 선택한 일곱 가지 대립 형질 중 두 쌍 이상의 대립 형질이 유전되는 경우, 각각의 형질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고 독립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1900년은 ‘멘델 법칙 재발견의 해’

▲ 분꽃이라는 이름은 검은색 씨앗 안에 들어 있는 흰 가루에서 유래되었다. 윤상구 사진작가

멘델은 이 연구 결과에 ‘식물 잡종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을 붙이고 브르노 자연사 학회로 보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그의 논문을 무시했다. 그가 대학을 중퇴하고 연구 실적도 없는 성직자인 데다 당시 생물학자들이 이 엄청난 발견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낙담한 멘델은 그 논문을 인정받으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게다가 얼마 후 수도원장에 임명되자 아예 실험을 그만두었다. 다만 “나는 나 자신의 실험에 만족하며 이 실험은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는 기록을 남겼을 뿐이다.

멘델의 논문이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그가 사망한 지 16년이 지난 1900년의 일이다. 멘델과 비슷한 주제를 연구하던 네덜란드 식물학자 휴고 드 브리스(Hugo de Vries)는 도서관에서 멘델의 논문을 발견했다. 그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며 멘델의 논문을 첨부했고 이를 통해 멘델의 논문이 세상에 알려졌다.

독일의 과학자 카를 에리히 코렌스(Carl Erich Correns)는 자신이 밝히고자 한 연구 결과가 멘델의 논문에 이미 다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연구를 포기했다. 멘델의 연구 성과에 ‘멘델의 법칙’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도 코렌스이다. 그제야 멘델의 이론은 정설로 받아들여졌고 학계에서는 1900년을 ‘멘델 법칙 재발견의 해’로 지정하였다. 비로소 멘델은 명실공히 ‘현대 유전학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코렌스, 분꽃의 예외적 특성을 발견하다

분꽃이 멘델의 ‘우열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도 코렌스다. 우성인 붉은 분꽃과 열성인 흰 분꽃을 교배하면 붉은 꽃이 아닌 중간 형질의 분홍색 꽃이 나온다. 심지어 여러 꽃 유전자가 섞이면서 한 그루에서 붉은색·노란색 꽃이 나오기도 하고 하나의 꽃잎에 두 색이 같이 있거나 그 두 색이 점점이 섞인 꽃잎도 있다.

박완서 소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에는 어린 시절, 저녁이면 한꺼번에 피어나는 분꽃이 신기해서 꽃이 벌어지는 모습을 목격하고자 꽃봉오리 하나를 정해서 지키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딴 꽃은 다 피는데 지키고 있는 꽃만 안 핀 적이 있는데 그걸 본 어머니는 웃으며 말했다.

“그건 꽃을 예뻐하는 게 아니란다. 눈독이지. 꽃은 눈독·손독을 싫어하니까 네가 꽃을 정말 예뻐하려거든 잠시 눈을 떼고 딴 데를 보렴.”

어머니 말대로 했더니 신기하게도 그동안 꽃이 활짝 벌어졌다는 이야기다.

멘델은 살아생전 자신의 연구 성과에 대해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멘델의 법칙’은 세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지켜보지 않아도 필 꽃은 피어나고 멘델 같은 천재는 인정받으려 안달하지 않아도 주머니 속 송곳처럼 언젠가는 겉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