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을 마치며…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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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믿고 내 소설을 신뢰한 스카이데일리와 독자분들께 감사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2-05 06:20:51

아주 먼 옛날, 최초의 ‘당신’이 있었다. 당신은 혼자인 것이 싫어 또 다른 ‘당신’을 원했다. 당신은 당신을 만나 사랑하고 새로운 당신을 낳았다. 세월이 흘러 세상은 수많은 당신과 당신들로 가득 찼다. 각각의 당신은 저마다 달랐다. 당신은 하루 종일 해변에서 조개를 주웠다. 어떤 당신은 까치발을 들어 붉게 익은 사과를 따고, 풀숲을 헤쳐 새가 갓 낳은 알을 주웠다. 또 다른 당신은 산과 벌판을 달려 창을 던지고 활을 쏘아 사냥했다. 강물을 헤엄치거나 바다에 뗏목을 띄워 물고기를 낚는 당신도 있었다. 당신은 집 짓는 법을 배우고 가축을 기르고 봄엔 씨앗을 뿌렸다. 가을에 거둬들인 밀을 빻고 가루를 반죽하여 빵을 구울 줄도 알았다. 입김이 하얗게 얼어붙는 겨울이 와도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힘껏 손을 흔들며 이제 막 시작되는 하루를 반겨 맞았다. 당신이란 언제나 힘차고 용감하고 씩씩한 것 같았다.

머나먼 옛날, 최초의 ‘나’가 있었다. 나는 외로운 것이 싫어 또 다른 ‘나’를 원했다. 나는 나를 사랑하고 새로운 나를 낳았다. 시간이 흘러 세상은 수많은 나와 나로 가득했다. 저마다의 나는 각각 달랐다. 나는 온종일 시냇가에 앉아 흘러가는 물결을 바라보았다. 어떤 나는 산에 올라 야아호, 소리치고는 야아호 야하오, 반갑게 맞아 주는 메아리를 기다렸다. 또 다른 나는 새처럼 높이 하늘을 날거나 훠어이 훠어이 바람처럼 멀리 떠날 수 있기를 바랐다. 실로폰처럼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방울이나 눈꽃처럼 흩날리는 꽃잎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 날들도 있었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 동굴 벽 가득 검은 숯으로 그림을 그리고, 동그랗게 입술을 말아 휘파람을 불며 아에우이오, 서로 다른 소리를 만들어 노래도 불렀다. 장단 맞추어 달빛 아래서 춤을 출 줄도 알았다. 이른 아침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이 햇살을 받아 반짝일 때, 볼을 어루만지는 바람의 입김이 간지러워서 깔깔 웃기도 했다. 그런 날조차 어둠이 내리면 왜 두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는지,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리 멀지 않은 옛날, 태양을 마주 보고 선 나는 눈이 부셔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처음으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보았다. 발뒤꿈치에서 자라난 그림자는 이리 가면 이리 따라오고 저리 가면 저리 따라왔다. 그림자는 매일매일 시시각각, 길어졌다 짧아졌다 다시 길어지며 끝내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침이 되면 햇빛과 함께 다시 피어났다. 넌 누구니? 해가 떠서 해가 질 때까지 그림자 앞에 쭈그리고 앉아 물었지만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찬 바람이 불고 낙엽이 졌다. 함박눈이 그친 어느 겨울밤, 모닥불 앞에 앉아 있던 나는 밤하늘의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사나운 멧돼지를 사냥하여 의기양양 돌아왔던 당신이 아무도 모르게 어둠 속으로 숨어드는 것을 훔쳐본 뒤였다. 찢어진 살에서 흐르는 피를 씻어 내며 당신은 혼자 흐느끼고 있었다.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을 것처럼 씩씩해 보이기만 하던 당신조차 가끔은 홀로 숨어 운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별과 별 사이, 당신의 눈물이 은하수가 되어 나의 가슴으로 흘러내렸다. 그날 밤 나는, 하늘뿐 아니라 땅 위에도 수많은 별이 있음을 알았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건, 아무도 본 적 없는 당신의 눈물이었다. 나와 닮은 당신, 모닥불이 흔들릴 때마다 따로따로 흔들리지만, 바람이 방향을 바꿀 때면 이따금 하나로 합쳐지던 당신과 나의 그림자, 그제야 내가 당신인 줄 알았다. 비로소 당신이 나의 진정한 그림자, 또 다른 나임을 알았다.

어둠 속에서 당신을 안아 주고 싶었다. 괜찮다고 손잡아 일으켜 주고 싶었다. 사냥할 줄도, 낚시할 줄도 모르던 나는, 그림 그릴 줄도, 노래할 줄도, 춤을 출 줄도 모르는 나는, 당신에게 줄 것이 없었다. 모래 위에라도 쓰고 싶었다. 밀물이 나의 글을 오늘 밤 지워 버린다 해도, 내일이 오면 푸른 파도로 높이 일어선 바다가 세상을 향해, 지난밤 삼킨 나의 말들을 토해 낼 거라고, 그러면 어깨를 힘없이 늘어뜨리고 해변을 걷던 당신이 소라껍데기처럼 주워 가만히 귀 기울여 줄 거라고, 나는 믿었다.

빛과 어둠 사이에서 나는 쓰고, 길과 길의 교차로에서 당신은 읽는다. 그리고 오늘, 무한한 시간과 시간의 좁은 모퉁이를 잠시 스쳐 지나가는 혜성처럼, 책 한 권을 사이에 두고 당신과 내가 만났다. 글자와 문장과 여백 속에서 하나의 영혼으로 결합하는 아름다운 마법의 순간. 위안과 희망과 사랑이 바로 이 시간, 여기에 있다. 나와 함께하는 당신에게 감사한다.

나를 믿고 내 소설을 신뢰한 스카이데일리와 매일 연재를 기다려 준 독자 여러분께 말과 글로는 다할 수 없는 깊은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멀리, 따로따로 흩어져 있다 해도 사랑하는 모든 나와 모든 당신들. 트러스트 미. 트러스트 유.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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