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50] 희재 양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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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2-24 06:30:00

‘희재 양화점’은 외가 오촌 당숙집에 양녀로 간 막내 이름을 따 지은 수제화 전문점이다. 6·25 전쟁이 터지고 아버지가 월남 후 생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구두닦이였다. 윤희숙의 조부는 목사였다. 동란이 터지자 할아버지는 희숙 아버지와 할머니를 남한으로 먼저 내려보냈다. 그 뒤 희숙 아버지는 조부와 소식이 끊겼고 모친은 아들을 데리고 부산까지 내려갔다. 아버지 형제들이 월남했다는 소식은 들려왔지만 정확히 어디 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구두닦이만 하다 국제시장 한 모퉁이를 얻어 구두수선을 배웠다.

스무 살에 어머니를 만나 결혼했는데 어머니도 신앙이 깊은 가정의 막내딸이었다. 희숙은 모태 신앙이었다. 희숙 어머니는 막내를 낳은 지 3년 만에 혈액암이라는 불행과 마주했다. 중학생 희숙은 엄마 역할을 했다. 동생들 아침상 차려서 먹이고 등교시켰다. 아버지 도시락도 희숙이 몫이었다. 아버지는 손님이 없어도 아침 일찍 양화점으로 출근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집에서 일찍 나가고 늦게 들어오시는 습관이 생겼다. 아마도 어머니 기운이 남아 있는 집에 계신 게 힘든 모양이었다.

희숙은 매일 양화점에 들러 도시락을 전달하고 등교했다. 하교하면 아버지 양화점 먼저 들렀다. 아버지는 희숙이 양화점에 들르는 시각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오후 다섯 시, 희숙은 수업이 일찍 끝나는 날은 교실에 남아 예습·복습했고 늦게 끝나는 날은 시장에 들러 저녁거리를 사 갔다. 양화점에 들러 아버지께 인사부터 하고 집으로 들어가 동생들 저녁밥을 준비하는 게 반복된 패턴이었다.

희숙은 공부를 잘했다. 아버지는 양화점에 들른 희숙에게 매번 같은 질문을 했다. “오늘은 학교에서 뭘 배웠누?” 학교에서 배운 게 많아 어떤 걸 말해야 할지 몰랐지만 아버지가 궁금한 건 무얼 배웠는지가 아니라 학교에서 칭찬받은 이야기였다.

그걸 알았기에 희숙은 아버지가 듣고 싶어 하는 모범답안을 만들었다. 영어 경시대회에 뽑힌 이야기, 수학 모의고사에서 만점 받은 이야기, 100미터 달리기 1등. 희숙은 아버지에게 지난한 삶의 한 줄 희망이자 기쁨의 화수분이었다.

어머니는 암이 발병한 지 2년 만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밀린 병원비를 빌리러 혈연이며 지연이며 아는 집은 다 찾아다니셨다. 월남한 처지라 부산에 사는 친척이 있을 리 없었다. 아버지는 뒤늦게 내려온 삼촌 소식을 듣고 돈을 꾸기 위해 서울 사는 삼촌 집을 찾아가기도 했다.

빌린 돈으로 어머니 병원비를 감당하긴 역부족이었다. 자식이 없는 어머니 오촌 당숙 뻘 되는 분이 막내 희재를 양녀로 삼길 원했다. 오촌 당숙은 어머니 병원비도 해결해 주었고 아버지께 두 평 남짓 구둣가게를 열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희숙이는 심봉사 눈을 뜨게 한 심청이가 어린 희재에게 빙의됐다고 생각했다. 희재를 떠나보내던 날, 어머니를 보냈던 날보다 가족은 더 구슬프게 울었다. 희재가 왜 나만 가, 발버둥 칠 때 희숙은 어린 동생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 깊이 모를 허탈감에 빠졌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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