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봄볕은 며느리 쪼이고 가을볕은 딸 쪼인다”는 말이 있다. 봄볕은 강렬해서 사람을 현란하게 만들고 가을볕은 차분해서 마음의 안정을 줄까? 이런 생각을 해봤지만, 햇빛은 요리조리 피해 다녔다. 며칠 전, 우리 동네, 늘 지나다니던 길, 매일 보는 벤치에 앉아보았다. 처음에는 스산했다. 하지만 노오란 빛은 아주 부드러웠다. 그렇게도 따갑게 내리쬐던 한여름의 태양과는 비교가 안 되는 편안함이 있었다. 앉아서 포근함을 느끼는데 어느 사이 뱃속이 더워졌다. 몸 안의 장기들에 열기가 느껴졌다.
태양을 올려다보니 더 이상 순해 보이지 않았다. 가을 태양은 열정이 넘쳤다. 곧 냉기로 가득 찰 땅과 인간을 챙기는 듯 온 힘을 다해 따스함을 보내고 있었다. 릴케의 시 ‘가을날’이 떠올랐다.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시인은 마지막 열매들이 무르익도록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달라고 기도한다. 그 이틀의 햇볕이 바로 이런 것이었을까.
태양과의 조우를 마냥 즐길 수 없었던 것은 이마에, 등에 땀이 차올랐기 때문이다. 인공 사우나와는 전혀 다른 태양의 열기가 “이제 충분하다”고 내 등을 떠밀었다. 행복감이 몰려왔다. 자연에서 자연스럽게 쥐어 본 시간이었다. 그 무엇도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도시 한가운데서 이런 만남을 가진 것이 신기했다.
가을볕은 무슨 일을 할까? 각종 열매를 푸근하게 익혀 이사 보내고 별별 잎들을 다른 색으로 물들여 땅 위로 내어놓는다. 동물들에게 월동 준비를 시키고, 풀과 나무의 겨울나기를 위해 수분을 거두어 간다. 꽃을 아끼는 사람들을 위해 가을꽃도 몇 가지 선사해 준다. 가을볕은 이렇게 갈무리하면서 대지와 생명들에게 여름날의 열기를 각인시킨다.
우연히 나는 이 가을볕을 쪼인 '호강스러운 딸'이 되는 행운을 누렸다. 평소에 나는 봄볕 속에 활기찬 청춘을 마주한다. 따갑고 화려하게 팽창하는 빛처럼 그들은 화사하다. 젊은이들은 봄이 힘들다고 느낄 것이다. 꽃을 피우고 잎을 올리고 키를 높이고 수분도 해야 하니까. 그래도 봄에서 여름으로는 미끄러져 들어가듯 자연스럽다. 유전자에 새겨진 대로 치열하게 살아낸다.
중장년은 가을을 마주한다. 그들은 가을의 축복을 알고, 다가올 겨울의 한기를 예감한다. 그러기에 가을은 애잔하다. 떠나보내야 완성되는 것들이 그들 앞에 즐비하다. 한 시절 애지중지 품었던 열매, 함께 일했던 잎들을 떨구어야 한다. 그렇게 한 세대가 가고 한 세대가 시작된다. 이별은 빠를수록 좋다. 늦추면 과태료가 부과된다. 현명한 나무들은 씨앗 속에, 그리고 씨앗 바깥에 풍성한 노잣돈과 선물을 쟁여서 세상으로 보낸다. 될수록 먼 곳으로 떠날 수 있게 최선을 다한다.
칼릴 지브란은 ‘예언자’에서 부모를 활에, 아이를 화살에 비유했다. 활이 할 일은 팽팽하게 휘어져 화살을 멀리 날려 보내는 것이다. 이번 가을, 인간 세상에도 다음 세대를 향한 출발 신호가 이곳저곳에서 들린다. 잘 익은 과일처럼, 꽉 찬 씨앗처럼 엄마 나무를 떠나는 똘똘한 열매들이 작별을 알린다. 다사롭고 부드러운, 생명력 넘치는 가을볕 아래서 그들의 시작을 축복해 주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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