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의 ‘유리천장’이 여전히 공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내 주요 증권사의 임원 가운데 여성의 비중이 5%도 채 되지 않았다. 여성 직원 수가 절반에 육박한 것과는 사뭇 달랐다. 여성 임원을 단 한명도 선임하지 않은 증권사들도 많았다. 다만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이 최근 재계의 최대 화두로 부상함에 따라 증권사 등 금융사들이 여성의 고위직 진출을 막는 ‘유리천장’ 문제를 개선하는데 앞장설 것으로 기대된다.
증권사 임원 23명 중 여성 임원 1명 꼴
금융감독원(금감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기준 자산 2조원 이상 주요 증권사 24곳의 전체 임원 997명 중 여성 임원(등기·미등기 합산)은 43명으로 드러났다. 비율로 환산하면 평균 4.31%다. 남성 임원 22명을 뽑아야 겨우 1명의 여성을 선임하는 수준이다.
여성 임원 비율이 10%를 넘은 곳은 삼성증권(10.0%)이 유일했다. 이 밖에는 모두 한 자릿수였다. KTB투자증권(8.51%), 유진투자증권(7.14%), NH투자증권(7.02%), 신한금융투자(6.67%), 유안타증권(6.67%), 대신증권(5.71%), 미래에셋증권(5.66%), SK증권(5.62%), KB증권(5.26%), 메리츠증권(4.55%) 등이 간신히 평균을 넘겼다.
특히 하나금융투자(2.50%), 한화투자증권(3.23%), 신영증권(2.70%), 교보증권(3.85%), 현대차증권(3.13%) 등 5곳의 여성 임원은 1명에 불과했다. 이 중에는 사외이사도 포함돼 있어 내부 승진으로 ‘유리천장’을 뚫은 여성 임원 수는 더 적었다. 사외이사를 제외하면 하나금융투자와 한화투자증권의 여성 임원은 0명이다.
심지어 한국투자증권, 하이투자증권, DB금융투자, IBK투자증권, 한양증권, 부국증권, 이베스트투자증권 등 7곳은 단 한 명의 여성 임원도 선임하지 않았다. 여성 등기임원을 선임하지 않는 곳도 24개사 중 15곳이나 달했다.
증권사 여성 임원 비율은 일반 상장법인과 비교해 봐도 현저히 낮은 수준이었다. 여성가족부가 지난해 6월 발표한 ‘상장법인의 임원 현황’에 따르면 전체 상장법인 2148곳(자산 2조원 이상)의 전체 임원(8749명) 중 여성 임원 비율은 4.5%(397명)였다.
문제는 여성 직원 수에 비해 여성 임원이 현저히 적다는 점이다. 흔히 ‘남초’ 직장으로 분류되는 자동차, 철강, 건설사 등은 여성 직원 수가 적은 만큼 여성 임원도 적어 내부승진을 거쳐 임원에 오를 여성 인력 자체가 부족한 것으로 해석된다.
대표적으로 현대자동차의 1분기 기준 임원 489명(등기·미등기 합산) 가운데 여성 임원은 14명(2.86%)에 불과했다. 정규직·기간제 근로자를 합산한 전체 직원(7만388명) 대비 여성 직원 수는 4087명(5.81%)이었다. 여성 임원과 직원 비율의 뚜렷한 차이는 없었다. 철강회사인 포스코도 마찬가지였다. 전체 임원 82명 가운데 여성 임원은 2명(2.43%), 전체 직원(1만7684명) 대비 여성 직원 비율도 5.57%(985명) 수준이었다. 삼성물산 역시 여성 임원 비율과 여성 직원(건설 부문)의 비율은 각각 4.70%, 8.84%로 모두 한 자리 수였다.
이와 달리 증권사는 여성 직원 수는 많았지만 ‘남초 기업’과 여성 임원은 비슷한 수준이었다. 자산 2조원 이상 증권사 24곳의 전체 직원(3만4351명) 중 여성 비율은 평균 39.41%였다. 여성 임원 비율(4.31%)과 비교하면 9배가 넘는다. 특히 메리츠증권과 부국증권을 제외한 나머지 22곳의 여성 직원 비율은 30~50%대였다.
증권사만의 문제는 아니다. 은행, 보험, 자산운용사 등 전 금융권에서 여성 임원은 부족한 실정이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금감원을 통해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금융회사(시중은행·보험사·증권사·자산운용사) 444곳의 전체 임원(4855명) 중 여성은 7.4%(358명)에 불과했다. 반면 임원을 제외한 직원의 비율은 48.2%(8만1451명)에 달했다. 금융사의 ‘유리천장’이 여전히 공고하게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장 의원은 “최근 활성화 되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과 투자 측면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조직 내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은 집단적 사고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며 “따라서 금융회사는 물론이고 국내 기업들은 기업 생존을 위해서라도 지배구조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산 총액 2조원 이상 상장법인, 여성 임원 최소 1명 이상 둬야
ESG 경영의 전 세계적인 확산으로 여성 임원 비중은 투자 결정의 중요한 지표로 부각되고 있다. ESG 평가기관마다 점수를 측정하는 기준은 다르지만 ESG 평가에선 여성임원 비율을 높이는 등 양성평등 노력에 대한 점수를 반영하는 분위기다.
특히 글로벌 투자회사들의 움직임은 적극적이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은 2018년 여성 이사가 2명 미만인 기업에는 투자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ESG 경영의 일환으로 성별 다양성에 관한 요소가 투자에 영향을 주고 있고 기업 가치를 위해 여성 인력 확보가 중요한 시점’이라는 이유에서다.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도 지난해 초 여성이나 백인이 아닌 이사회 멤버가 없는 다양성이 결여된 기업들에 대한 기업공개(IPO) 업무를 맡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같은 해 말 미국 증권거래소 나스닥 역시 여성, 성소수자 등 소수계층 2명을 이사진에 포함하고 1년 안에 이사회의 다양성 현황을 공시한 기업만 상장할 수 있게 하겠다고 밝혔다.
우리나라는 정부가 주도하는 흐름이다. 자본시장법 개정에 따라 자산 총액 2조원 이상 상장법인은 내년 8월부터 이사회 전원을 특정 성(性)으로 구성할 수 없다. 여성 등기임원을 최소 1명 이상 둬야 한다는 얘기다.
달라진 경영 환경에 발 맞춰 증권사를 보유한 국내 금융그룹들은 여성과 관련한 활동을 선보이며 성별 다양성을 강화하고 있다. 정기 인사에서 여성 임원을 선임하는 것을 넘어 양성 프로그램을 출범해 여성 인력을 직접 육성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하나금융그룹은 지난달 15일 그룹의 차세대 여성 리더 육성 프로그램인 ‘하나 웨이브스(Hana Waves)’ 1기 출범식을 개최했다. ‘하나 웨이브스’ 1기로 선정된 여성 리더는 총 34명이다. 그룹 내 여성 부점장급 직원을 대상으로 각 관계회사 최고경영자(CEO)의 추천을 받아 최종 선정됐다.
이들은 올해 말까지 △그룹 멘토링 △온라인 MBA △자기주도 학습(인문학, 디지털, 리더십) △독서토론 △소규모 자율 멘토 활동 △전략과제 발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리더로서 필요한 자세와 역량을 배울 예정이다.
신한금융그룹은 ‘신한 쉬어로즈(Shinhan SHeroes)’를 통해 여성리더를 체계적으로 육성하는데 힘쓰고 있다. 이는 그룹 내 여성 리더 육성을 위해 2018년부터 시작한 금융권 최초의 여성 인재 육성 프로그램이다. 지난해 3기까지 여성 리더 143명을 배출했다.
올해 4월에는 4기 인원 44명을 선발해 6개월 간 멘토링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조직운영, 사업추진, 커뮤니케이션 등과 관련한 외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그룹 멘토링’과 개인별 강점 진단을 기반으로 여성 리더십을 강화할 수 있는 ‘맞춤형 코칭’을 제공할 예정이다.
KB금융그룹은 여성 리더십 강화 프로그램인 ‘WE(Womans Empowerment) STAR 멘토링’을 운영하고 있다. KB증권은 본사 여성 팀장 대상으로 ‘밸류업(Value-up) 과정’을 실시하고 지점 여성 서비스팀장을 대상으로는 자산관리 아카데미 수강을 의무화해 직무 전문성을 강화하고 있다.
임희정 한양사이버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는 ‘ESG 경영 관점에서 여성임원 할당제 의미와 과제’라는 논문에서 여성임원 할당제가 성공적으로 안착하기 위해선 “여성임원 할당제를 적극적 우대조치로서 한정할 경우 역차별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기에 양성평등의 관점뿐만 아니라 지배구조의 개선 측면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임 교수는 “이사회의 구성은 기업지배구조와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여성이사의 선임은 이사회의 성 다양성을 확보하게 돼 남성 중심의 획일적 조직문화와 의사결정에 변화를 가져오고 기업의 재무성과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기업이 장기적으로 내부 승진을 통한 여성임원을 배출하기 위해서는 여성인재를 발굴, 육성하는 제도 마련과 더불어 중간관리자들의 경력단절을 예방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임 교수는 “여성의 경력단절을 막기 위해서는 업종 특성과 기업규모를 고려한 다양한 방식으로 일·가정 양립 제도가 구축돼야 한다”며 “이러한 일·가정 양립제도가 조직 내에서 잘 작동할 수 있는 인사관리 및 조직문화의 개선도 요구된다”고 지적했다.
[윤승준 기자 / 시각이 다른 신문 ⓒ스카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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