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잖아요. 여럿이 모여 하나의 집단, 하나의 사회를 구성하고 그 속에서 만나고 헤어짐을 통해 형성되는 ‘관계’는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행위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저는 ‘관계’에 초점을 맞춰 그 행위의 근본적인 의미를 추상적으로 헤아리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제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관계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깊이 고민해보고 재정립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지난 70여년간 눈부시게 발전해 온 우리나라는 최근 찬란한 문명의 이면에 감춰진 예상치 못한 문제들과 마주하고 있다. 기술의 변화는 우리를 편하게 만들고 삶의 질을 높였다. 그러나 정신없이 바쁘게 흘러가는 시대 속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과 소통은 점차 줄어들고 있는 모습이다.
더구나 지난해 발생한 코로나19 여파로 만남과 소통이 단절되다시피 하면서 오늘날 인간 관계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가족과 친구, 이웃 등 만나고 소통하는 것이 당연했던 이들과 관계를 끊어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는 곧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탐구하고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로 부상했다. 이러한 모순적인 사회에서 인간의 삶의 이유와 관계에 중심을 두고 그림을 그려나가는 작가가 있다. 바로 박찬국 작가다.
1년 휴학·1년 공부 반복해 마친 대학 생활… 자신만의 작품 방향 찾기 위해 열심히 모색 중
박 작가는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졸업 후 10년 넘게 작가로 활동하면서 움직임과 관계 등 여러 주제를 작품 속에 녹여내고자 고민했다. 또 숯이나 목탄, 조개가루, 대리석 가루 등 다양한 재료를 통해 주제를 표현하고자 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그는 순수 미술(Fine Art)에 정통한 작가로 박수를 받게 됐다. 그러나 그가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평탄한 길을 걸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순수 미술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고등학생일 때만 해도 애니메이션 쪽에 더 관심이 컸어요. 하루는 미술을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의 개인 화실에 놀러간 적이 있어요. 그곳에서 에곤 쉴레 작품집을 보게 됐죠. 그의 작품을 본 저는 정말 충격에 빠졌어요. 거친 붓질 속에 부드러움이 담겨 있는가 하면 노골적으로 묘사한 인체가 퇴폐적으로 보이기는커녕 아름답더라고요.”
“오늘날 대중의 높은 평가를 받는 에곤 쉴레가 참 부러웠어요. 적나라하게 그려진 인체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음란한 것이 아닌 예술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걸 몸소 증명한 사람이니까요. 이에 저도 그처럼 저만의 그림으로 평가를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예술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죠.”
박 작가는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방향이 무엇인지 끝없이 탐문했다. 자신만의 작품을 구상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한때 대학 커리큘럼을 거부하기도 했다. 친구들이 교수님께 회화 방식 등 기존의 지식을 배우는 동안 박 작가는 ‘나만의 것’ 찾기에 더욱 파고들었다.
박 작가의 방식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대학 생활을 무려 10년이나 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를 듣고 나면 그가 자신만의 작품 방향을 파악하는 데 왜 그리도 열심이었는지 이해하게 될 터이다.
“대학을 10년 다녔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참 오래 다녔다고 할 거예요. 석·박사 과정도 아니고 오로지 학사 과정으로만 10년이면 더더욱 그렇죠. 그런데 전 그래야만 했어요.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 작업 비용 등을 스스로 벌어야만 했거든요. 1년 휴학해서 번 돈으로 다음 1년 간 등록금과 생활비, 작업 비용을 모두 충당했어요.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하다 보니 10년이 훌쩍 지나가더라고요.”
“일과 작업을 병행하는 것은 솔직히 무리였어요.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야 공부도 하고 작업도 할 수 있는 탓에 열심히 벌어야 했거든요. 이 시간이 길어지다보니 저도 모르게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해 고민하고 있더군요. 그렇게 길고 긴 고민의 시간에 들어간 것 같아요.”
“그런 가운데 머지 않아 ‘나만의 것’을 찾아 제 작품을 선보이는 것이 저를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줄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됐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일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제가 추구하는 것을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해야 하니까요. 일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되자 힘든 것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이렇듯 누구든 힘든 시련과 고난의 강도는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작품 해석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안타까워… 스스로 해석하는 기회 마련코자 노력
박 작가는 그림 그리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세상에서 가장 객관적이고 공평한 업(業)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저는 축구가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스포츠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필드 위의 선수들은 제각기 키와 몸무게가 다르고 달리기 속도와 발 재간이 각각 달라요. 서로 다른 재능을 가진 선수들은 각자의 능력을 뽐낼 수 있는 포지션에서 최선을 다하죠. 공격수는 슛을 날리고 골키퍼는 공을 막는 것처럼요.”
“미술도 마한가지예요. 서로 다른 재능을 가진 작가들이 각자의 능력을 마음껏 펼쳐 다양한 작품으로 구현해내요. 작가별로 다른 재능이 서로에게 핸디캡이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풍부한 작품을 만들어 내도록 자극하는 기회가 되는 거죠.”
“게다가 작품을 통해 대중으로부터 객관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는 점도 그림을 그리길 잘했다고 느끼게 해요.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치관과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이에 사람들의 평가도 제각기 다르죠. 그래서 제 작품을 본 사람들이 다양한 평가를 내릴 때 참 기뻐요. 사람들로 하여금 작품 속에 담긴 의미를 찾도록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각기 다른 평가를 공유하면서 사람들의 생각이 더 풍요로워지도록 만드는 계기가 된 것 같아서요.”
최근 박 작가는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또 그 생각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자리를 다시금 마련했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아트비프로젝트에서 개인전 ‘BEYOND THE LIGHT’를 연 것이다. 전시는 1, 2부로 나뉘어 1부는 이달 17일까지, 2부는 24일부터 다음달 2일까지 이어진다.
그는 관객들이 전시된 작품을 통해 스스로를 반추하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답을 스스로 구하는 사람은 결코 없어요. 모름지기 사람은 자기 객관화가 어려운 존재니까요. 그래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통해 스스로를 파악해요. 마치 거울에 반사된 듯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거죠.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근거를 여기서 찾을 수 있어요.”
“그러나 코로나 여파로 인해 사람들의 관계는 무참히 파괴되고 있어요. 사회적 거리두기를 이유로 사람들이 서로 만날 수조차 없는 상황인 거죠. 이는 타인과의 관계는 물론 스스로를 파악할 수 있는 기회마저 상실하도록 만들어 버렸어요.”
“이에 오늘날 인간 관계에 대해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만남과 소통이 불가한 시대가 도래하면서 상대방을 통해 스스로를 반추했던 사람들이 자신을 되돌아볼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스스로를 파악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볼 것을 제안하고 싶었거든요.”
박 작가의 말을 듣다 보니 불현듯 주변 지인에게서 들은 안타까운 얘기가 떠올랐다. 초등학교에 갓 들어간 아이가 일기에 ‘친구는 나쁘다’고 적었다는 것이었다. 아이들 간 거리두기를 위해 선생님이 친구와 가깝게 붙어 어울리고 얘기하는 것은 보건상 좋지 않다는 식으로 얘기한 것이 아이가 이해하기엔 친구와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된 듯했다. 인간 관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박 작가의 말이 크게 와닿았다.
박 작가는 스스로를 ‘오늘날의 이야기꾼’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작품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화두를 던지고 스스로 생각하게끔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매개로 사람들이 서로 만나고 소통하면서 스스로를 보다 명료하게 인식하길 바란다고 했다.
“‘예술’이라고 하면 지레 겁부터 먹는 사람들이 있어요. 답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다른 사람들이 해석한 작품의 의미와 자신이 느낀 점이 다를까 봐 두려워하는 거죠. 그러다보니 작품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지 못하고 남의 생각과 같은 답 찾기에만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참 안타까워요.”
그러면서 작품에 대한 해석을 다른 사람에게 주입하는 것은 매우 나쁜 행위라고 지적했다. 하나의 해석이 절대적이고 유일한 해석인 양 작품의 의미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고민해 찾은 답이 자신에게 있어 최고의 해석’이라고 강조했다.
끝으로 박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보는 이에게 말을 걸고 그래서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며 작가로서의 포부를 밝혔다.
“예술가로서 대중의 의식을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만들고 싶어요. 무엇이든 쉽게 소비되는 이 시대에 이야기의 힘은 길 위의 돌멩이에 이름을 지을 수도 있고 많은 사람들의 기억으로 남게 되기도 하니까요. 제가 만든 작품을 매개로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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