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부터 퇴직연금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옵션)가 본격 시행에 들어갔다. 디폴트옵션은 퇴직연금 가입자가 별도의 운용지시를 내리지 않으면 사전에 지정한 상품으로 퇴직연금을 운용하는 제도다. 디폴트옵션을 통해 퇴직연금 적립금이 원리금보장상품에서 주식 등 실적배당형 상품으로 옮겨갈 경우 퇴직연금의 수익률은 크게 치솟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생애주기에 따라 자산을 분배하는 타깃데이트펀드(TDF)는 시장 규모가 2030년 150조원 이상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자산운용업계는 TDF 상품·이벤트를 속속 내놓고 있다.
국내 퇴직연금 수익률, 글로벌 평균보다 7%p 낮아
5일 금융권에 따르면 퇴직연금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는 이달 중 심의위원회(본심의)를 열어 디폴트옵션 상품에 대한 적격 승인을 내리고 상품을 공시할 예정이다.
앞서 고용부는 7월 디폴트옵션 제도를 도입한 이후 퇴직연금사업자로부터 사전협의를 거쳐 상품 신청을 받고 실무위원회(기초심의)를 진행해왔다. 향후 가입자의 선택권 보장과 사업자 간 경쟁을 높이기 위해 디폴트옵션 상품의 적립금액·운용현황·수익률 등을 분기별로 공개할 방침이다.
디폴트옵션은 퇴직연금 중 확정기여(DC)형과 개인형 퇴직연금(IRP)에 한해 적용된다. 퇴직연금 사업자가 디폴트옵션 상품에 대한 정보를 근로자에게 제시하면 그 가운데 양질의 상품을 직접 고르는 식이다. 근로자가 무관심할 때 디폴트옵션이 발생한다.
상품 만기가 도래했음에도 4주간 운용지시를 내리지 않을 경우 운용사가 디폴트옵션 운용을 통지하는데 이로부터 2주가 더 지나면 디폴트옵션으로 설정한 상품에 퇴직연금이 자동으로 운용된다.
최윤아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과거 퇴직연금에 무관심한 가입자는 만기 후에도 최종 지정된 운용 상품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디폴트옵션 제도가 DC·IRP형에 적용됨에 따라 가입자는 제시된 디폴트옵션 상품 중 하나를 의무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며 “상품을 선택하지 않을 경우 예·적금 운용이 아닌 이자가 거의 없는 대기성 자금으로 분류한다”고 설명했다.
디폴트옵션 도입은 퇴직연금 시장의 저조한 수익률에서 비롯됐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295조6000억원이었지만 수익률은 2.00%에 그쳤다. 2017년 1.88%, 2018년 1.01%, 2019년 2.25%, 2020년 2.58% 등 수년 째 1~2% 수익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 세계 퇴직연금 수익률이 8~10% 달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현저히 낮은 편이다. 이는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편중된 국내 퇴직연금 시장의 구조적인 문제로 풀이된다. 지난해 퇴직연금 전체 적립금 중 86.4%가 예·적금 위주인 원리금보장형 상품으로 운용됐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용부는 퇴직연금 운용 대상에서 위험자산 비중을 100%까지 허용할 방침이다. 과거 퇴직연금 규정은 적립금의 최대 70%까지만 위험자산 투자를 할 수 있고 나머지 30%는 안전자산으로 운용해야 했다. 현재는 자동 투자되는 30%에 디폴트옵션 상품이 적용된다. 기존 투자상품 70%를 주식형 펀드로 설정하고 디폴트옵션 30%도 주식형 펀드로 설정할 경우 퇴직연금의 100%를 위험자산으로 운용할 수 있다.
디폴트옵션 제도를 시행하면 수익률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다른 나라의 상황을 살펴보면 미국은 2006년 연금보호법을 제정하면서 위험자산 투자비중이 증가했다. 회사가 근로자 대표와 협의해 한 가지 디폴트옵션을 제시하는 방식이다. 실적배당형 상품을 디폴트옵션으로 제시하도록 설정해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최소화했다. 근로자는 디폴트옵션에 자동으로 가입된다. 적격 상품이기만 하면 손실이 나더라도 회사는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호주는 근로자가 산업·기업별 다양한 기금을 선택해 가입하는 기금형으로 퇴직연금 제도를 운용한다. 디폴트옵션인 ‘마이슈퍼(MySuper)’의 상품을 의무화했다. 기금 간의 디폴트옵션 상품 경쟁을 통해 높은 퇴직연금 수익률로 이어졌다는 평가다. 최 연구원은 “미국과 호주 모두 디폴트옵션을 도입하면서 높은 수익률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며 “그 결과 두 국가의 위험자산 투자 비중은 90%를 상회하고 있고 연평균 수익률은 8% 내외로 높다”고 말했다.
美 디폴트옵션 도입 후 TDF 규모 연평균 20% 올라
고용부가 제시한 디폴트옵션 상품의 유형은 △TDF △밸런스드펀드(BF) △스테이블밸류펀드(SVF) △사회간접자본(SOC) 등이다. 시장에서는 TDF에 주목하는 분위기다. TDF는 투자자의 은퇴시점(빈티지)에 맞춰 위험·안전자산의 비중을 자산배분 프로그램(글라이드 패스)에 따라 조정하며 수익을 추구하는 생애주기형 펀드다. 정년퇴직이 다가올수록 변동성을 낮게 관리하는 구조로 설계돼 간편하게 안정적인 수익률을 올릴 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내 TDF 시장은 이미 성장 국면에 돌입했다. 국내 TDF 순자산 금액은 2016년(1조3000억원)부터 매년 2배 이상 늘어나며 지난해 11조원을 넘어섰다. 올 8월말 기준 11조6000억원이다. 10년 전인 2011년(8000억원)과 비교하면 비약적 수준의 성장세다. TDF 전체 순자산 중 퇴직연금에서 유입되는 비중도 2016년 25% 수준에서 2021년 70%로 불어났다.
한국보다 앞서 디폴트옵션을 도입한 미국의 사례를 보면 더 낙관적이다. 미국은 2006년 디폴트옵션에 해당하는 QDIA(Qualified Default Investment Alternatives)를 도입했다. 이후 미국의 TDF 시장 규모는 2006년 1140억달러에서 2021년 1조7000만달러로 커졌다. 최근 10년간 연평균 20%씩 성장하고 있다. 퇴직연금에서 유입되는 자산 비중도 85%에 달했다.
자본시장연구원은 미국의 사례를 한국에 적용하면 국내 TDF 시장 규모가 2030년 154조원까지 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홍원구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미국의 경우 디폴트옵션 제도의 시행을 계기로 TDF 규모가 급격한 성장을 보였기 때문에 국내에서도 디폴트옵션의 본격 시행과 함께 TDF의 성장은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커지는 TDF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운용사들은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핵심은 운용보수 수수료다. 한국투자신탁운용은 지난달 ‘한국투자TDF알아서펀드’의 운용보수를 15% 낮추며 수수료 전쟁에 불을 지폈다. 빈티지별로 2020∙2025∙2030은 0.23%에서 0.196%로, 2035는 0.28%에서 0.238%로, 2040∙2045∙2050∙2055∙2060은 0.33%에서 0.281%로 인하했다.
한화자산운용도 지난달 ‘한화 LIFEPLUS TDF’의 운용보수 수수료를 8~10% 내렸다. 빈티지별 인하 폭은 상이했다. △2035는 0.30%에서 0.27% △2040·2045·2050은 0.35%에서 0.32% △2020·2025·2030은 0.25%에서 0.23% 수준이었다. 8월에는 삼성자산운용이 ‘삼성한국형TDF’의 운용보수 수수료를 0.03% 낮추며 경쟁에 가세했다. KB자산운용은 올 1월과 7월 두 차례에 걸쳐 ‘KB온국민 TDF’의 운용보수 수수료를 10%씩 인하했다.
홍 연구위원은 “수익률은 운용 결과에 따라 달라지지만 투자자가 지급하는 비용은 결과에 관계없이 지급돼 총보수의 차이는 장기 투자성과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서 “보수율이 높은 TDF의 수익률이 충분히 높지 않다면 퇴직연금 가입자에게 잠재적 손실이 될 것이기 때문에 TDF의 선택에 있어 비용 측면이 중요해진다”고 전했다.
TDF 상장지수펀드(ETF) 출시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KB자산운용은 지난달 업계 최저 보수를 앞세워 KBSTAR TDF액티브 ETF 3종(2030·2040·2050)을 상장했다. 총 보수는 연 0.18%로 모두 동일하다. 글로벌 리츠 비중을 높여 기존 상품과 차별화를 시도했다. 글라이드 패스의 주식 비중은 78%로 시작해 은퇴시점에 맞춰 37.5%까지 줄어들 예정이다. 앞서 6월에는 삼성·키움·한화자산운용에서 TDF ETF 상품을 내놨다. 지금까지 총 13개다.
김해인 대신증권 연구원은 “TDF는 생애주기에 맞춰 자산배분 비중이 바뀌기 때문에 매매가 편리한 ETF라 할지라도 잦은 매매는 지양해야 한다”면서 “은퇴 시점까지 투자자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강점으로 내세우고 있는 만큼 퇴직연금과 같이 단기간에 매도하지 않고 꾸준히 납입해야 TDF의 장점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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