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지위 또는 관계적 우위를 이용해 근로자에게 신체적이나 정신적인 고통을 주는 행위를 금지하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된 지 약 4년이 흘렀다. 그런데 사업장 규모가 작을수록 직장 내 괴롭힘이 더욱 팽배한 것으로 나타났다. 괴롭힘을 당한 많은 근로자가 보복이나 불이익을 우려해 신고하지 않고 참으며, 결국 버티지 못하고 회사를 떠나는 것으로 조사됐다. 경쟁력이 경영의 핵심 요소인 중소기업의 입장에서 직장 내 괴롭힘을 근절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직장 선배 텃세에 쫓기듯 이직”… ‘직장 내 괴롭힘’ 중소기업서 더 심해
첫 직장으로 데이터 분석 관련 중소기업 경리직에 취업한 김미소(가명·25) 씨는 6개월간 회사에서 근무하다 최근 타 기업으로 이직했다. 김 씨는 업무 특성상 대표와 선임 근무자가 같은 공간에서 근무하는데 입사 이후부터 선임 근무자의 텃세가 시작됐다고 털어놨다.
김씨는 “대표와 친밀도가 높은 선임 근무자의 텃세 때문에 쫓겨나듯 이직해야 했다”며 “사내 프로그램을 능숙하게 다루지 못한다는 이유로 ‘답답하다’ ‘대학은 어떻게 졸업했냐’라는 식의 조롱은 물론 대표와 식사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업무능력이 떨어진다고 면박을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대표도 지속적으로 안 좋은 얘기를 듣다 보니 상담을 빙자해 퇴사를 권고하는 듯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며 “첫 직장서부터 따돌림을 당하니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지난해 김영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고용노동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된 2019년 7월 이후 지난해 8월까지 약 3년간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된 사업장은 총 133곳으로 집계됐다. 이 중 기업 규모별로 보면 근로자 수 50명 미만인 소규모 사업장이 93곳으로 69.9%로 나타났다.
이어 중소기업으로 분류되는 50인 이상 사업장은 33곳, 근로자 300인 이상으로 중견·대기업에 속하는 사업장은 7곳으로 나타났다. 직장 내 괴롭힘이 발생한 사업장 약 95%가 중소기업인 셈이다. 김 의원은 “중소기업의 경우 직장 내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밀접하게 한 공간에서 같이 일할 확률이 높기 때문에 그 심각성이 매우 크다”고 꼬집었다.
이런 가운데 피해자들은 고용부 등에 신고하더라도 계속해서 난처한 상황에 내몰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단법인 직장갑질119가 여론조사 전문업체인 엠브레인퍼블릭에 의뢰해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1월부터 8월까지 접수된 신원이 확인된 이메일 제보 총 1442건을 분석한 결과 제보 사례 중 854건이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했다고 밝혔다.
이 중 관계 기관에 실제로 직장 내 괴롭힘 신고를 했다는 사례는 331건으로 집계됐다. 주목할 대목은 신고자는 신고했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불리한 처우를 당한 사례가 10건 중 4건 꼴(40.2%·133건)이었다는 점이다. 신고를 이유로 보복을 당한 것으로 풀이된다.
근로자 10명 중 7명(73.5%)은 괴롭힘을 당했을 때 참거나 모른 척하고 넘어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9년 9월 조사 때(59.7%)보다 13.8%p 늘어난 수치다. 회사 또는 기관에 신고한다는 응답은 7.6%에 불과했다. 신고하지 않은 이유와 관련해서는 ’대응을 해도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응답이 74.5%로 가장 많다. 향후 인사 등에 불이익을 당할 우려도 12.8%나 됐다.
권두섭 변호사(직장갑질119 대표)는 “직장 갑질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나지만 괴롭힘을 당했을 때 직장 안에서의 신고 절차나 고용노동부 등 공적 신고 절차는 피해자들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며 “신고에 따른 피해자 불이익이 없도록 보호조치를 강화하고, 조직문화와 인식개선을 위한 실태조사를 정기적으로 실시해 이를 토대로 실질적인 예방교육을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인력이 경쟁력인데… 직장 내 괴롭힘에 퇴사·이직 70% 이상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중소기업 1000개사를 대상으로 채용동향 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 기업의 70.7%가 지난해 필요 인원보다 적은 수의 인력으로 회사를 운영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인력 현황과 관련해선 과반수 기업(57%)이 ‘인력부족’ 상태라고 응답했다. 가장 큰 채용 애로로는 ‘필요 인력에 비해 입사지원자 부족’(47.2%)이 꼽혔다.
가뜩이나 인력난을 호소하는 중소기업의 입장으로선 직장 내 괴롭힘이 자칫 경쟁력을 깎아내리는 행위라는 비판의 시선도 있다. 중소기업의 인력난이 이같이 심화하는 가운데 직장 내 괴롭힘 경험이 근로자의 근로 의욕을 저하시킴은 물론, 나아가 퇴사·이직 등 인력 이탈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한국노동연구원이 근로자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과거 직장에서 괴롭힘 피해를 입은 경험이 있는 근로자는 전체의 62%로 집계됐다. 이 중 53%는 타 직장으로 이직했고, 18%는 경력단절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단순히 합산하면 직장에서 괴롭힘을 당한 10명 중 7명(71%)이 그 회사를 떠난 셈이다.
직장갑질119에 따르면 직장 내 괴롭힘 경험이 있는 근로자들은 근로의욕 저하 등 업무 집중도 하락·이직 및 퇴사 욕구 상승 등의 영향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자칫 근로자의 근로 의욕 하락에 따른 기업의 생산성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심지어 인력 지원이 부족한 중소기업의 입장에서 직장 내 괴롭힘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기업 이미지가 나빠지면서 추후 채용에도 악영향을 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기업 정보 플랫폼 잡플래닛이 지난해 취업 준비생 101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88.6%의 응답자들은 ‘사내 성범죄나 폭행 등 직장 내 괴롭힘이 있었던 회사에 가고 싶지 않다’고 응답하기도 했다.
김향아 한국노동연구원 전문위원은 “직장 내 괴롭힘은 결국 장기적으로는 기업의 경쟁력을 해치는 문제이기 때문에 기업 차원의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며 “괴롭힘 예방 교육을 활성화와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에 대한 적극적인 홍보는 물론 괴롭힘 책임을 가해자 개인보다는 조직 차원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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