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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 한복판에 ‘조선저축은행’이 들어선 것은 1929년 6월 일제강점기였다. 제2금융권으로 분류되는 저축은행(구 상호신용금고)과 명칭은 비슷하지만 둘 사이에 큰 상관은 없다. 조선저축은행은 국내 최초의 예금 전담 은행으로 서울 중구 남대문로에 본사가 있었다. 신세계 백화점 본점 바로 옆이다. 당시엔 경기도 경성부 본정1정목에 속했다.
일제강점기라는 특성상 주식의 40%가 조선식산은행 소유였다. 조선식산은행은 조선총독부가 주도해 설립한 산업금융기관으로 조선의 돈을 일본으로 유출하는 데 앞장섰던 금융기관이다.
일본인을 위해, 일본인에 의해, 일본 자본으로 설립되었으면서 이름만 조선저축은행이었던 그곳. 슬픈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자.
네오바로크 양식의 고풍스러운 본사 건물
회현역 부근 남대문 시장 입구에 눈에 띄는 하얀색 화강암 건물이 있다. 고풍미가 물씬 풍기는 네오바로크 양식의 이 건물이 바로 1935년에 지어진 조선저축은행 본사다.
국내 건축물 중 최초로 국제 현상설계를 거쳐 일본인 건축가 히라바야시 긴코에 의해 설계되었다. 철골·철근 구조를 사용한 최초의 은행 건물이라고 한다. 이에 건축사적 의의를 인정받아 1989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되었다.
1935년 당시 이 건물 부근에는 조선은행 본점(현 한국은행 본관)·미쓰코시 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본점)·경성중앙우편국(중앙우체국)이 자리하고 있어 근대 상업의 중심을 이루었다.
조선저축은행은 아래로는 부산과 여수, 위로는 평양과 함흥에 지점을 둘 만큼 위세가 대단했다. 광복 후에도 같은 이름으로 영업을 이어 가다가 1958년 ㈜제일은행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2005년부터는 외국계 기업이 인수해 SC제일은행이 되었다.
조선저축은행 본사 건물은 SC제일은행 측에서 줄곧 본점으로 사용했으나 2015년에 이르러 신세계그룹에 매각했다. 이 건물은 향후 상업사박물관으로 재탄생될 예정이다.
대한제국이 시작된 역사적 현장에서
구 러시아공사관과 덕수궁을 잇는 이 110m의 길이 ‘고종의 길’이다. 오솔길처럼 폭이 좁아 맞은편에서 사람이 걸어오면 살며시 몸을 틀어야 할 정도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이 비좁은 길을 걸어 1896년 2월11일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약 1년 뒤 이 길을 걸어 다시 경운궁(덕수궁)으로 돌아왔다. 궁으로 돌아온 지 234일 만에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대한제국이 시작된 길 ‘고종의 길’을 지나노라면 담 너머에 자리한 의문의 이층집이 눈에 들어온다. 갈색 지붕의 이 집이 조선저축은행 중역 사택 건물이다. 1938년 7월 완공한 이 사택은 연면적 465㎡(140여 평)에 서양식과 일본식 주택 양식을 절충하여 지었다.
원래 이 일대는 조선왕조 역대 왕들의 어진과 신주·신위를 안치하는 ‘선원전’ 이었으나 1920년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 일제는 선원전을 철거한 자리에 조선저축은행 사택을 지었다.
이곳은 광복 이후 주한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로 사용되었다. 훗날 미대사관에서 이 일대에 직원 관사 건립을 추진하면서 매장문화재 진단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 땅이 선원전 영역임이 밝혀진 것이다.
2011년 정부는 토지 교환 형식으로 조선저축은행 중역 사택과 주변 땅을 흡수하였고 2039년 완공을 목표로 현재 선원전 복원사업을 진행 중이다. 조선저축은행 사택 역시 복원하여 한국의 근현대사를 홍보하는 시설로 활용할 계획이다.
남대문·정동 일대는 조선왕조 500년 사에서 더할 수 없이 중요한 지역이었고 근대기를 지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상업지구로 번성을 누렸다. 비록 조선저축은행이 일제강점기의 ‘흑역사’를 품고 있다고 해도 아픈 역사도 역사다. 잘 보존하고 복원하여 오래 기억하는 것이 역사를 앞으로 밀고 나가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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