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요희의 작가 노트] 너를 구한 손이 너를 파괴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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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요희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6-12 06:30:10

구원과 파괴의 의미를 모두 담고 있는 글자가 있다. ‘약’이 그렇다.

세월이 약이다. 이 말에서 약은 구원을 의미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혹은 사별은 심장이 칼로 베이는 듯한 고통을 준다. 그러나 이런 큰 고통도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견딜 만한 수준이 된다. 세월은 약이다.

약쟁이는 마약중독자를 속되게 부르는 말이다. 마약은 뇌 신경망에 영향을 끼쳐 통제력에 관여하는 전전두엽과 정서 영역을 담당하는 변연계의 기능을 왜곡시킨다. 당장은 도파민 분출로 황홀감을 경험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뇌가 손상을 입게 되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진다. 마약은 몸을 고치는 약이 아니라 신체와 정신을 망가뜨리는 독약이다.

약(Pharmacy)의 어원 자체가 ‘독’을 뜻하는 파르마콘(Pharmarkon)이다. 소량의 독은 세균을 죽이고 신체적 고통을 덜어 주는 약으로 쓰이지만 과량을 투여할 경우 신체를 집어삼키는 독극물이 된다.

조선시대 사약의 재료로 알려진 부자(투구꽃의 덩이뿌리)는 약업계에서 피부가 찰 때 몸에 열을 올리는 약이었다. 온몸이 쑤실 때는 신경통 약이었으며 호흡이 미약할 때는 강심제였고 극심한 통증에는 진통제였다. 하지만 그 양을 조절하는 데 실패하면 사람의 목숨을 빼앗기도 했으니 삶과 죽음 사이, 실금보다 얇은 경계선 위에 위태위태하게 놓여 있는 게 약이었다.

플라톤은 인간이 발명한 문자를 파르마콘에 비유했다. 문자는 인간의 기억을 장기화시키고 물렁한 말을 단단하게 고정시켜 주는 반면 기억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어째 낯익은 비유 아닌가.

10년 전쯤 유행하던 ‘디지털 치매’라는 말은 디지털 기기에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기억력과 계산 능력이 점점 떨어지는 현대인의 증상을 가리키는 신조어였다.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버튼 하나로 모든 것을 해결하다 보니 기억하려는 노력을 점점 포기하고 그 결과 치매 비슷한 증상을 겪게 된 것이다.

▲ 약으로 발명한 현대 기계문명이 독으로 작용하는 중이다. 일러스트 임유이 기자

이때만 해도 괜찮았다. 비록 자기 집을 못 찾아 길바닥을 헤맬지언정 자신이 누군지는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최근 AI가 등장하면서 인류는 사유 능력까지 잃어버릴 지경이 됐다.

AI가 그림도 그려 주고 글도 써 준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이 해마를 축소시켜 치매를 불러왔듯 생각을 기계에 미루게 되면 전두엽이 작아져 종내는 사고와 판단이 정지될 수 있다. 약으로 발명한 현대 기계문명이 독으로 작용하는 중이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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