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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타고 고미술 상가나 마장동, 광장시장과 동대문 주변의 쇼핑 타운에서 괄괄하게 살아 있는 삶 속에 하루를 던지는 것도 즐거운 휴일을 보내는 방법이다.
그러나 나는 문화 명소들과 연결되는 역 플랫폼에 잠시 정차할 뿐, 그 어떤 곳에도 가 본 적 없었다. 5호선의 51개 승강장 중 직접 발을 디뎌 본 것도 열 손가락 안에 꼽혔다. 나에게 세상은 경험하고 체험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다만 스쳐 지나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생각해 보니 그 속에 머물고 싶어 발버둥 쳤고 스쳐 보내고 나서야 움켜잡으려 안간힘을 쓰며 허우적거렸다.
유리의 결혼식장을 나왔을 때 나는 또 막막했다. 하운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아내와 약속한 시간까지는 아직 네 시간이나 넘게 남아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을 되찾겠다는 열망이 강렬해질수록 그에 비례해서 하운에 대한 조바심도 점점 커졌다.
내가 하운을 버릴 수는 있어도, 그녀는 날 떠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운은 날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었다. 부지불식간에 내 머리에 새겨진 하운의 의무는, 날 살리기 위해 어떤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무엇이든 참아 주어야 할 사람이었다. ‘어떤 짓’ 속에 나는 괘씸하게도 지난밤 섹스조차 포함시켰고 ‘무엇이든’ 속에는 내가 그녀에게 덮어씌운 모독조차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화가 났다고 해도, 불과 몇 시간 후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게 될 나를 하운이 외면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하운이 내 전화를 피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나는 오싹 추웠다. 머리카락이 쭈빗 곤두서고 식은땀이 흘렀다. 내 어머니도, 열한 살 아들을 버렸다. 유리로 인한 사고 후유증으로 우울증에 빠져 있을 때 아내 또한 견디지 못하고 날 떠났다. 하물며 만난 지 나흘밖에 되지 않는 여자를, 나는 어떻게 그토록 철석같이 믿었던 것일까.
나는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두통이 느껴지는 머리를 감싸 쥐고 앉아 있었다. 열차는 달리고 멈추고 문을 열고 닫은 뒤 다시 달렸다. 사이사이 자동 녹음 안내방송으로 여성의 목소리가 다음 역의 이름과 출입문 방향을 알려 주었다.
내가 내려야 할 다음 역을 향해 출발하려던 순간이었다. 열차의 출입문이 두어 차례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누군가 위험하게 슬라이딩 승차를 한 모양이었다. 기관사가 직접 안전한 승하차를 당부하는 마이크 안내방송을 했다. 귀가 번쩍 뜨였다. 나는 숙이고 있던 머리를 들고 목소리가 들리는 스피커를 찾았다. 한 번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열차를 운전하고 있는 기관사는 용범 선배였다.
“넌 달에 언제 도착할래. 엄살 그만하고 나와. 달려야지.”
마지막 통화를 할 때 선배가 말했다. 평소 같았으면 승강장에 내려 모른 척 내 길을 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반가울 수도 있구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객차를 통과해 운전실과 가까운 열차 맨 앞 칸까지 나아갔다. 역에 당도한 열차가 운행을 멈추고 문을 열었을 때, 나는 밖으로 나가 운전실 앞에 마주 섰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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