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8] 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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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2-18 06:30:00

승연을 챙기는 동기는 은영이밖에 없었다. 은영이는 승연에게 멘토 선배를 정했냐고 물었다. 몇 해 전부터 학교에 신입생이 상급생에게 멘토를 요청하는 제도가 생겼다. 멘토가 정해지면 멘토는 하급생 멘티가 학교생활에 적응하도록 관리하고 챙기는 의무를 졌다. 멘토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정하지 않아도 됐다. 은영은 버스 시간이 아직 남았으니 학과 사무실에 들르자며 승연의 팔을 끌어당겼다. 승연은 은영이가 무안할까 봐 마지못해 그러마, 응했다.

영문과 사무실은 만우관 3층 맨 끝에 있었다. 대여섯 평 남짓 사무실엔 몇몇 선배가 먼저 와 있었다. 조교는 책상 위에서 무엇인가 열심히 적고 있었다. 개구리 문양 군복 상의를 걸친 예비역과 금테 안경 쓴 단발머리 여자가 두 칸짜리 소파에 앉아 믹스커피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들어가도 돼요?” 은영이 반쯤 열린 문틈을 비집고 고개를 내밀었다. “why not?” 단발머리 금테 안경이 은영 뒤로 따라 들어온 승연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학교 부적응자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본 듯했다. 하얗고 작은 얼굴에 갸름한 턱선, 여릿한 인상의 금테 안경 여자는 통이 넓은 카고바지에 카키색 야상을 걸쳤다. 청순한 이미지를 배신하는 옷차림이었다. 마른 몸매지만 가슴까지 마른 형은 아니었다. 앉은 자세로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을 때 개미허리와 봉긋한 가슴이 드러났다. 그녀는 깐깐한 기숙사 사감을 연상케 했다. 친절하지만 선을 넘지 않는, 배려하지만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는, 관대할 때와 냉정할 때의 경계를 아는,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 같은.

금테 안경 선배는 후배들 왔는데 미안하지만 가 봐야 한다며 신입생 환영회 때 보자는 말을 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아담한 체구에 비해 작은 키가 아니었다. 내성적인 성격인 줄 알았던 은영은 예상과 달리 선배들 앞에서는 또박또박 말을 잘했다. 수시로 치마 앞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뺐다 하는 행동은 산만했고 거슬렸지만. ‘조다쉬’ 로고가 박힌 청치마 길이는 은영의 작은 키에 비해 길게 느껴졌다. 은영은 조다쉬 청치마를 일주일째 입고 있었다. 핑크빛이 도는 체크무늬 셔츠에 조다쉬 청치마·군청색 트렌치코트·흰색 힐을 신은 은영의 패션은 촌스럽고 우스꽝스러웠다. 체크무늬 셔츠에 청치마·트렌치코트의 조화는 흠잡을 맘이 없지만 흰색 하이힐이라니.

흰 구두는 5월1일부터 10월1일 사이에 신는 것이 패션 멋쟁이들 사이에선 암묵적인 규정인데 그걸 모르는군. 승연의 오빠가 패션 잡지 논노를 정기 구독해서 보는 바람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왜 그런 규정이 생겼는지 찾아보진 않았다. 짙은 크림색이라면 모를까 시리다 못해 도화지처럼 새하얀 구두는 3월의 쌀쌀한 날씨와 부조화였다.

조다쉬는 갑자기 불어든 열풍이었다. 블랙진 데님 소재 중 진한 색감의 청바지 브랜드로 급부상한 조다쉬는 패션 열풍을 타고 대학가를 강타했다. 말 그림의 로고가 보이도록 상의를 바지나 치마 안에 넣어 입었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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