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로 넓힌 개정 상법 시행 1년.
국내 상장사 경영 현장에는 ‘소송 공포’의 긴장감이 흐른다. 제도 도입 후 사내 검토 절차를 강화하고 외부 자문을 늘리는 등 방어 경영에 나섰지만, 정작 신사업이나 인수합병(M&A) 같은 과감한 투자는 지연·보류되는 등 ‘경영 위축’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사회 문턱은 높아졌지만, 정부와 유관기관이 현장의 혼선을 줄일 정교한 보완책을 내놔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는 상황이다.
13일 대한상공회의소의 상장기업 300개사 대상 ‘상법 개정 1년, 경영환경 변화와 제도 안착을 위한 지원과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 기업의 84.3%가 상법 개정 이후 이사회 운영 방식에 변화가 생겼다고 답한 것으로 확인됐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사전 검토 절차의 강화’다. 구체적인 대응 방식(복수 응답)으로는 사내 점검 절차 신설 및 강화(47.0%)가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소송 리스크를 방어하기 위한 사외 자문과 기록 보강 움직임도 팽팽했다. △외부 전문가 법률·회계 자문 확대(45.7%) △이사별 찬반 의견을 담은 의사록 상세 작성(43.7%)이 상위권에 올랐고, △안건 사전 배포 및 검토 의견 제출(39.7%) △특별위원회 구성(14.0%) 순으로 조사됐다.
상법 개정이 가져온 변화를 두고 기업들의 평가는 갈렸다. 투명성 개선 등 ‘긍정적 영향’을 체감했다는 응답이 39.6%로 가장 높았으나, 컴플라이언스 비용 증가와 의사결정 지연 등 ‘부담 가중’을 호소한 기업도 22.4%에 달해 부작용 역시 혼재함을 드러냈다. 아직 별다른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고 답한 기업은 10곳 중 4곳(38.0%)이었다.
상법 개정의 핵심인 ‘이사 충실의무 확대’는 기업들에게 무거운 법적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실제 상장사의 과반(53.7%)이 제도 시행 이후 주주대표소송이나 손해배상청구 등 소송 리스크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고 답했고, 소송 우려가 줄었다는 응답은 6.0%에 불과했다.
이러한 ‘소송 포비아’는 고스란히 기업의 과감한 투자 지연으로 이어졌다. 상법 개정 이후 주요 의사결정 추진 경과를 묻는 질문에 기업 5곳 중 1곳꼴인 21.7%가 ‘법적 검토 강화로 인해 주요 의사결정이 지연·보류·취소됐다’고 밝힌 점이 이를 말해준다. 규제가 초래한 경영 위축이 위험 수위에 도달한 것이다.
발목이 잡힌 주요 결정 중에는 신사업 및 M&A 등 신규 투자(30.8%)가 가장 많아 미래 성장동력 위축이라는 우려를 키웠다. 뒤이어 재무·자본 조달(18.5%), 임원 선임 및 보수(16.9%), 자산 취득·처분(15.4%), 계열사 간 거래 및 구조 변경(15.4%) 순으로 지연·취소 빈도가 높았다.
지난해부터 세 차례에 걸쳐 시행된 상법 개정 후속 조치에 대한 기업들의 대응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상황이다.
당장 내년(2027년) 1월 시행을 앞둔 ‘전자주주총회 의무화’(자산 2조 원 이상 상장사 대상)의 경우, ‘제도 및 운영체계 구축을 완료했다’고 답한 기업은 16.0%에 머물렀다. 가장 많은 34.0%의 기업이 ‘내부 검토 중이나 구체적 조치 착수 전’이라고 답했고, ‘정관만 개정하고 운영 시스템 정비 미착수’(26.0%), ‘플랫폼 선정 및 보안 체계 검토 등 시스템 구축 중’(24.0%) 순으로 조사돼 인프라 마련이 시급한 것으로 드러났다.
내년 7월 말까지 독립이사 선임 비율을 기존 4분의1에서 3분의1로 채워야 하는 상장사(자산 1000억 원 이상~2조 원 미만)들의 발걸음도 바빠졌다. 대상 기업의 과반(52.8%)이 “현재 후보자 선정을 위한 작업을 추진 중”이라는 답변을 내놨다.
추진 기업 중 24.1%는 후보 물색 전 단계이며, 11.1%는 후보 선정에 난항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후보 선정을 마치고 차기 주총 상정을 대기 중인 기업은 17.6%에 그쳤다. 이미 요건을 충족한 기업은 47.2%였다.
3월 시행에 들어간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두고도 기업들의 셈법이 복잡했다. 의무소각 대상 자사주를 보유한 기업의 64.9%가 여전히 뚜렷한 대응책을 찾지 못한 채 고심 중이었다.
24.0%는 당장 M&A나 경영권 방어에 쓰던 자사주 활용 전략을 수정해야 하는 상황이고, 21.1%는 주주환원 정책을 명확히 수립하는 계기로 활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매년 주주총회 승인을 새로 받아야 하는 등 실무적 부담이 가중됐다는 호소도 17.1%로 만만치 않았다.
상장사들은 개정 상법의 현장 안착을 위해 정부와 유관 기관이 정교한 뒷받침을 서둘러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기업들이 가장 갈증을 느끼는 부분은 모호한 법 조항을 보완할 ‘구체적인 지침’이었다. 응답 기업의 37.3%가 노조의 이익 배분 요구 등 현장 갈등 상황에서 이사가 조율할 수 있는 충실의무 가이드라인을 주문했다. 기업의 정상적인 경영 활동 위축을 막기 위한 ‘경영판단 원칙 명문화’(20.3%)와 현장 실무자 대상의 법률 교육 지원(12.7%)도 시급한 정책 과제로 꼽혔다.
최은락 대한상공회의소 조사본부장은 “상법 개정 이후 지난 1년간 기업들은 소송 리스크 속에서도 이사회 운영 방식을 선제적으로 바꾸며 제도 준수를 위해 노력해 왔다”며 “새로운 제도가 시장에 완전히 안착하려면 기업의 자구 노력뿐 아니라, 다양한 현장 사례를 반영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 마련과 실무 부담을 덜어줄 정부의 밀착형 정책 지원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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