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가난한 화전민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오로지 성공하겠다는 일념으로 초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와 안 해본 장사 없이 모든 장사를 다 해봤죠. 그러던 중 목조각을 접하게 됐죠. 처음에는 단순히 배를 굶지 않기 위해 시작한 목조각이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죠”
경기 여주시 강천면에 위치한 목아박물관에서 박찬수(71) 목아박물관 관장을 만났다. 박 관장은 국가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을 보유한 인간문화재다. 박 관장은 지난 1996년 목조각장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국가무형문화재로 인정 받았다. 우리나라 목조각 분야 최고 권위자로 우뚝 올라 선 박 관장이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서울 상경 후 갖은 고초, 우연한 기회에 접한 목조각으로 국내 최정상 반열
“제가 태어난 곳은 경남 산청군 생초면 상촌리입니다. ‘지리산이 푸르고(山淸·산청) 풀이 생생한(生草·생초) 동네에서도 가장 위에 있는 마을(上村·상촌)’이라는 의미를 가진 동네죠. 하늘 아래 첫 동네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궁벽한 산촌이었어요. 주민 대부분은 화전민으로 힘들게 농사를 지으며 생을 이어 나갔죠”
김 관장은 어려웠던 집안 사정 탓에 어린 시절부터 농사를 지으며 학업을 병행해야 했다. 5남매 중 3째로 태어난 그는 막내 동생이 태어난 지 3개월 째 되던 해 어머니를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3살이었다.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나고 가세가 크게 기울어 결국 김 관장은 서울로 돈을 벌러 나서야 했다. 1960년, 그의 나이 12살 때 일이었다.
“서울 생활 초기, 아마 그 시절에 안 해 본 일은 거의 없을 거에요. 신문배달은 물론 화장실 청소일까지 했어요. 장사도 많이 했죠. 아이스크림, 찹쌀떡·메밀묵, 우산, 모기장 등 돈 될 만한 건 다 팔아 본 것 같아요. 야간 통행금지가 걸리던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는 여인숙에서 쌍화탕을 팔기도 했죠”
김 관장이 처음 목조각을 시작한 시기는 서울에 올라온 지 1년여가 지난 13살 때였다. 친인척 중 한 명이 서울 답십리에서 운영하던 ‘신라조각사’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처음 목조각을 접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배고픔을 조금이나마 덜어보기 위해 새로운 일을 찾았구나 하는 생각으로 목조각을 배웠다.
“신라조각사에 취직해서 목조각을 배우면서 받는 돈은 정말 적었어요. 목조각을 배우면서도 기존에 하던 여러 장사들을 계속 병행해야 했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죄로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이상하게 목조각을 손에서 떼기 어려웠어요. 오히려 배우면 배울수록 점차 빠져들어갔고 실력도 차쯤 늘어갔죠”
김 관장은 25살이 되던 해 처음으로 자신의 조각품을 반도호텔에 납품하기 시작했다. 반도호텔은 지금의 명동 롯데호텔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당시 반도호텔에는 목조각을 판매하는 상점이 따로 있었다. 특히 주한미군들과 일본인들이 한복을 갖춰 입은 모양의 목조각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제가 만든 공예품이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게 처음에는 신기하기만 했어요. 특히 일본인들이 제 작품을 많이 좋아했죠. 일본인들이 당시 돈으로 10만엔(한화 약 100만원)을 주고 제 작품을 사가기 시작했어요. 반도호텔에서 제 작품이 팔려나가기 시작하면서 차츰 저도 경제적인 여유를 찾기 시작했죠”
최연소 국가무형문화재 지정…“박물관 설립, 나무연구 등 목조각품 위해 평생 바칠 것”
박 관장이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목조각장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시기는 지난 1989년 이후부터였다. 1989년 박 관장은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서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하게 됐다. 1976년부터 1989년까지 총 14회에 걸친 전승공예대전에 모두 참가해 입선, 특선, 장관상 등의 수상을 꾸준히 하다가 마침내 최정상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후 차츰 목조각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그는 국가무형문화재 반열에 올랐다.
“제가 국가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것은 제 나이가 46살 때이던 지난 1996년 12월이에요. 최연소의 나이였죠. 그 때까지만 해도 국가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는 주로 60대 이상의 고령자들에게 수여되곤 했죠”
박 관장에 따르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목조각을 잘 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된다.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등 당시에 만들어진 목조각을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해낼 수 있어야 한다. 문화재청으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은 후에야 비로소 목조각장으로 지정될 수 있다.
“저는 제 자신만의 목조각을 만드는 것과는 별개로 문화재를 옛 모습 그대로 복원·수리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난 1985년에는 문화재수리 기증 보유자로 지정 받기도 했어요. 그 결과,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일본 국보 1호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원형 그대로 복제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어요”
그는 자신이 만든 목조각 작품들을 전시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마음에 박물관을 열기로 결심했다. 1989년 2월 착공에 돌입한 후 1993년 6월 목아방물관 문을 열었다. 박물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1992년 12월에는 등록사립박물관 분류돼 문체부 박물관리스트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박물관 이름인 ‘목아(木芽)’는 박 관장의 호이다. 나무 씨앗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박물관이 문을 연지 거의 30년이 다 되가요. 저는 많은 사람들이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 처음 박물관을 문을 열기로 결심했어요. 문화생활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삶의 질이 올라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죠”
지금도 목아박물관에서는 설립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많은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고 있다. 매년마다 전시품을 바꾸는 것은 기본이다. 각 초·중·고등학교에서 체험활동을 오도록 유치하는 한편 사생대회 등도 매년 주기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박 관장은 목아발문관 운영 외에 한국의 목조각품을 알리기 위해 해외 전시회도 꾸준히 열고 있다.
“전 세계에서 전시회도 자주 열었어요. 지난 2006년에는 한불수교 120주년 기념으로 프랑스 국립천주교박물관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죠. 미국 뉴멕시코주 산타페와 뉴욕 총영사관, LA 총영사관 등 외에 캐나다 벤쿠버, 독일 함부르크, 일본 도쿄·오사카·나고야 등에서도 전시를 열었죠”
그는 국내에나 해외에서 전시회를 열 때 단순히 목조각품 전시 뿐 아니라 퍼포먼스도 함께 진행한다. 관람객들의 유독 흥미를 보이는 퍼포먼스는 즉석으로 얼굴 모양 등의 목조각을 깎아서 관객들에게 선물로 주는 것이다.
“저는 약 6년 전인 2013년부터 실무에서 손을 떼고 아들에게 목아박물관의 운영을 모두 맡겼어요. 이후 저는 강원 영월군 김삿갓면에 만든 초막에 들어가서 나무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죠. 나무가 곧 목조각품의 품질을 결정하기 때문이죠. 나무마다 성격이 다르고 결이 다르기 때문에 많은 공부를 해야 해요. 평생을 거쳐도 끝나지 않을 공부에요. 앞으로 남은 여생 또한 더욱 훌륭한 목조각품을 위해 바칠 생각이에요”
[이경엽 기자 / 행동이 빠른 신문 ⓒ스카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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