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나무로 만든 도마가 있었다
백정 무태의 도마였다
크기와 무게와 그 견고함으로
단연 도마의 왕이었다
수많은 칼질에 피와 살이 파고들어
이것으로 모진 학대를 견딜 수 있었다
행주산성 전투에서 도마는 성벽 위에 올려져
잠시 방패가 되었다
조총 탄환이 박히고 불에 그을렸지만
아직 쓸 만한 도마는 다시 칼을 받았다
오랜 세월 후
갈라지고 부스러져 옹이 부분만 남은 도마는
고임목이 되어 창고 문틀을 받치고 있었다
한 떼의 동학군이 관아를 습격하다
석화되어 단단해진 이 목재를 발견하고
공들여 깎고 기름에 튀겨 화승대 총알을 만들었다
도마가 이제 피와 살을 파고들었다
도마는 없다
박물관에도 역사책에도
도마는 보이지 않는다
도마들은 남아 있을 이유도 방법도 없었다
이름 없는 도마들을 위해 이 기록을 남긴다
도마의 전설(2023)/ 황정산
인류의 역사는 나무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나무가 이룬 업적은 지대하다.
나무는 전쟁터 무기의 시작점이었고
일터에서 사용하는 모든 연장의 출발점이었다.
그 많은 총칼과 창, 호미와 곡괭이들…
나무가 아니었으면 가능했을 것인가.
나무는 목재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도로공사와 주택공사에 호출되었다.
가옥 구조를 지탱하는
대들보·서까래·기둥·창틀·문·마루는 나무로 만들어졌다.
집 내부를 채운 탁자·의자·옷장·침대도 나무가 재료였다.
이처럼 나무는 인간의 삶에 초밀착되어 유구한 세월을 함께했다.
박물관 유물 가운데 목제품이 상당수를 차지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매일 만나는 목제품 중에 빠진 게 있다.
박물관에 전시된 도마를 본 일이 있는가.
나무로 만든 칼도 있고, 나무 탁자도 있고
심지어 나무 그릇과 나무 수저도 있는데
나무 도마만 없다.
과거 백정들은 짐승의 각을 뜨고, 포를 뜰 때
단풍나무 도마를 사용했다.
견고함에 있어 단풍나무를 따를 재료가 없었다.
수많은 칼질을 받아낸 단풍나무 도마 곳곳에는
짐승의 피와 살이 박혔고
백정의 눈물방울과 땀방울이 스며들었다.
임진왜란이 터져 조선의 모든 돌과 쇠가
전쟁터로 불려 나가는 와중에
백정의 도마도 소집 명령을 피할 수 없었다.
단풍나무 도마는 타고 난 견고함으로
기세 좋게 적의 총탄을 막아냈고
어린 병사의 목숨을 살렸다.
도마의 쓰임은 유구했다.
세월이 흘러 갈라질 대로 갈라진 도마는
고임목이 되어 창고 문틀을 떠받쳤다.
창고가 무너진 뒤에는 눈 밝은 이의 손에 의해
화승대 총알로 다시 태어났다.
총알은 아니, 도마는 혁명의 최전선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과업을 묵묵히 수행했다.
그는 인간의 살과 뼈를 파고들었고
종내는 인간과 함께 흙에 묻혔다.
백정 무태의 단풍나무 도마는 박물관에서도 볼 수 없고
역사책에도 기록되지 못했지만
다행하게도 한 시인에 의해 전설이 되었다.
임요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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