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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37] 루빈스타인을 좋아하세요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우리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2-26 06:30:10
 
 
잘 해낼 거란 확신이 생겼어요.”
 
오래전 그 아이의 웃음처럼, 내 눈을 쓰다듬던 정하운이 붉은 입술로 말했다. 나는 그녀가 내민 동의서에 힘주어 내 이름을 적었다.
 
나가는 순서는 들어올 때와 반대였다. 안대를 하고 정하운의 팔을 잡고 방을 나갔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카펫이 깔린 복도를 걸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렸다. 그녀의 구두 굽 소리를 들으며 차에 올랐다.
 
루빈스타인 좋아하세요?”
 
차를 출발시킨 뒤 정하운이 물었다. 내 대답을 기다린 건 아닌 듯 자동차 스피커에서 루빈스타인이 연주하는 쇼팽이 흘러나왔다.
 
루빈스타인도 눈이 보이지 않아 피아노를 치지 못했어요. 여든아홉 살이었다던가요.”
 
다른 사람의 불행이 나의 불행을 위로한다 해도 여든아홉 노인에게 닥친 불운이 희망을 주진 않았다. 나의 실망을 모르지 않을 텐데 정하운은 웃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루빈스타인은 스물한 살에 목을 맸어요. 하지만 죽음에 실패한 뒤 세계적 피아니스트가 되었지요. 눈이 보이지 않았어도 아흔여섯 살까지 피아노와 함께 살았어요.”
 
천재의 삶이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러나 내 눈을 쓰다듬을 때 목에 생긴 항복의 증거를 보았구나, 나는 어색하게 폴라티의 목 부분을 턱 쪽으로 높이 끌어올렸다.
 
죽음의 신이 편애하는 목숨이 있다고 생각한 적 있어요. 인간과의 협상은 철저히 배제하는 독단. 죽음은 생을 지배하는 최고의 권력이죠. 죽음만이 인생에서 딱 한 번, 확실하게 존재하잖아요. 누군가에게는 오랜 기간에 걸쳐 죽음을 유예하고, 또 누군가는 발밑의 맨홀 뚜껑을 열고 단번에 밀어 떨어뜨리지요. 하지만 죽음의 신이 있다 해도 그가 할 수 있는 건 주사위를 던지는 일뿐이에요.”
 
정하운이 결연히 말을 이어 갔다.
 
허공으로 던져진 주사위가 어디에 어떻게 떨어질지는 신조차 알지 못해요. 방금 강무훤 씨의 운명이 담긴 주사위가 던져졌어요. 그걸 낚아채는 건 이제 당신의 몫이에요.”
 
안대를 벗었을 때는 다시 여의나루역 3번 출구 앞이었다.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이고 주머니에서 해적 안대를 꺼내 썼다. 정하운이 도어 록을 풀었다. 이대로 끝인가? 다시 또 혼자인가? 차에서 내려야 하는 걸 알면서도 익숙한 두려움이 엄습해서 나는 머뭇거렸다.
 
읽어 보세요.”
 
정하운이 운전석 옆에서 노트 한 권을 꺼내 내 앞에 내밀었다. 보통 책 크기보다 조금 작고 낡은 노트였다. 겉장은 빛이 바랜 붉은색 벨벳으로 싸여 있었다. 나는 책을 받아 들고 차에서 내렸다. 인도에 올라서서 그녀가 떠나기를 기다렸다. 그때 조수석 유리창이 열렸다. 정하운이 내게 손을 뻗었다.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우리.”
 
정하운이 내 손을 꼭 잡았다 놓았다. 유리문이 닫히고 자동차가 출발했다. 그녀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나는 오래도록 서서 바라보았다. ‘우리라는 말이 달콤한 사탕처럼 혓바닥 위를 굴러다녔다. 나는 주먹을 꼭 쥐었다. 의심스러운 희망 하나가 심장을 뚫고 나와 새싹처럼 어둠 속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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