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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69] 기억상실증에 걸려도 우린 다시 사랑할까
당신을 잃는다는 상상만으로도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4-11 06:30:10
 
 
- 실내를 떠다니는 커피 향기와 뒤섞여공기는 따뜻했습니다. 나는 장갑을 벗고 목도리를 풀었습니다. 단추를 풀어 코트를 벗으려다 나는 손을 멈추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추운데 오래 걷게 해서 미안하오.”
 
당신이 팔을 뻗어 테이블 위에 올려 놓은 내 장갑에 손을 얹었습니다. 나는 코트의 단추를 풀려던 두 손을 테이블 밑으로 감추었습니다. 당신과 마주 앉았다는 자각이 나를 긴장하게 했습니다. 감청색 코트 안에 검정색 목 폴라 스웨터를 입은 당신의 얼굴은 하얗고 맑았습니다. 콧날은 반듯하면서도 부드러웠고 눈썹은 짙은 갈색으로 결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당신의 눈동자는 갓 태어난 별처럼 푸르게 반짝거렸습니다.
 
지금이라면 다른 결정을 할 수 있었을까? 다시 만났지만 시간이 흐른 만큼 인연은 더 멀어져 버렸다는 걸 확인했을 뿐이었지. 그때 알았네. 그녀에게 법률상 남편이 있다는 걸. 나 역시 가정을 깰 자신이 없었어. 아이들은 어렸고 어렵게 쌓아 온 사회적 위치도 버려야 했으니까. 부모님의 서슬 퍼런 질타도 감당할 자신이 없었지. 나도 갑순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어. 독일로 가겠다고 하더군. 보내 줄 수밖에 없었네. 아니 어쩌면, 어쩌면 말일세. 난 그녀가 떠나 주어서 안도했는지도 몰라.”
 
최주결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다는 듯 복잡하고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어둠을 향해 돌아섰다.
 
- 오늘 마켓에 갔다가 당신을 꼭 닮은 사람을 보았습니다. 하마터면 집어 들었던 붉은 토마토를 떨어뜨릴 뻔했습니다. 절대로 당신일 리 없었습니다. 독일의 비스바덴과 서울, 우리의 거리가 1만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어서는 아니었습니다. 당신과 내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쳐 버릴 가능성은, 알고도 모른 척 외면해야 할 이유는 단 1퍼센트도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당신을 기억하는 한, 당신이 나를 기억하는 한.
 
어느 날 당신과 내가 한날한시에 기억상실증에 걸린다면 그래도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게 될 것 같소?”
 
퇴근 후 종종 찾아갔던 그 찻집에서 당신이 물었습니다. 식물인간으로 장기 입원했던 환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였습니다. 그는 기적처럼 깨어났지만 가족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나는 쾌활하게, 당신을 놀려주려는 듯, 그럴 리 없다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스쳐 가는 인연일 뿐이란 말이오?”
 
당신이 물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잠시 생각한 내가 인사를 건넸습니다. 무슨 의미일까, 생각한 당신도 낯가림을 하는 아이처럼 인사해 주었습니다.
 
. 처음 뵙겠습니다.”
 
당신과 나는 먼 사람들처럼 마주 보았습니다. 첫선을 보는 사람들처럼 날씨에 대해서, 무뚝뚝한 찻집 주인에 대해서, 김을 뿜어 내는 노란 주전자에 대해서, 유리창을 흔드는 바람에 대해 몇 마디 물을 수도 있었지만 남남으로 살아간다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메어서 당신과 나는 더 이상 말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을 잃는다는 건 생각도 하기 싫군.”
 
연극이 서먹한 당신은 벌써 포기해 버렸습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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