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86] 주결의 유학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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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가게 주인이 들려준 이야기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5-09 06:30:10

- “학생이면서 병원 실습생이었지. 학비는 전부 무료였고 병원에서 생활비가 약간 지원이 되긴 했지만 하숙비를 내고 나면 한 달간 빵 사 먹을 돈도 모자랐소. 결혼 문제로 아버지하고 의절했을 때였거든. 처음 경험해 보는 가난이었소. 자다가 일어나면 천장에 머리를 쿵쿵 박을 만큼 낮은 다락방에서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덥고, 늘 배가 고팠지. 젊은 시절이었으니 한창 먹을 때였지만 마른 호밀 빵을 조금씩 잘라 먹는 게 내 끼니의 전부였소.

외국 유학 생활이라고 하면 화려해 보이지만 그때는 일하고 공부하기도 빠듯해서 일주일에 두 번, 새벽 일찍 제리 아저씨네 빵 가게에서 갓 구운 호밀 빵을 사 오는 게 내가 누리는 최고의 사치였소. 빵 냄새가 어찌나 좋던지 마을 사람들이 줄을 섰지. 금방 구운 빵을 사 올 수 있는 날이 내 생일 같았소.”

나는 가만히 눈을 뜨고 당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습니다. 당신은 코끝에서 빵 굽는 냄새가 난다는 듯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지요.

“논문을 준비하느라 며칠씩 잠도 못 자고 야간 당직까지 서는 날들이 계속되었소. 하루는 늦잠을 자고 말았지. 빵을 사는 날이었는데 말이오. 눈은 펄펄 내리고 바람이 어찌나 차던지 뺨이 다 얼어 터지는 것 같았지. 허둥거리고 뛰어갔지만 내가 사야 할 빵이 바구니에는 한 개도 남아 있지 않았소. 오늘 내일은 꼼짝없이 굶어야 하는구나, 낙심했소. 그 순간 모든 설움이 한꺼번에 치솟더군.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공부, 불투명한 미래, 늘 굶주린 배, 그리운 어머니. 그냥 다 포기하고 돌아오고 싶었소.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힘없이 돌아서는데 제리가 내 어깨를 툭 치더군. 그리고 내 앞에 빵을 내밀었소. 내 몫을 따로 챙겨 두었던 거요. 제리가 안겨 준 빵을 가슴에 끌어안고 나는 펑펑 울고 말았소.

새벽 장사를 끝내고 잠깐 숨을 돌리던 제리는 갓 구운 빵과 금방 내린 커피를 내주고는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나 해 주었소. 제1차 세계대전이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고 했소. 전쟁이 끝나고 모든 게 폐허였을 때였지.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부터 빵을 만들어 팔았기 때문에 제리 네 가족은 굶주림은 면할 수 있었다고 했소.

그즈음 동네 거리를 떠돌아다니던 노인이 있었소. 걸인이었지. 그런 이들이 한둘은 아니었을 거요. 그런데 그는 너무 나이가 들고 쇠약했소. 별다른 기술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노동으로 돈을 벌 힘도 없었지. 온종일 구걸해 봐야 하루 한 끼니도 해결하기 어려웠던 거요. 모두가 배고프던 시절이었으니까.

제리 네는 그 동네 유일한 빵집이었는데 노인은 배가 고프면 빵집 문 앞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었소. 눈을 감고 빵 냄새를 맡는 거였지. 상상으로 배를 채우는 것, 그것만이 노인에게 유일한 위안이었던 거요. 그러다 하루는 너무 배가 고파서 그만 빵 하나를 훔치고 말았소. 노인은 절룩거리는 다리로 밀빵 하나를 가슴에 끌어안고 아무도 없는 골목까지 달렸소. 그리고 빵 조각을 뜯어 입 안에 밀어 넣었을 거요.

여기까지 말한 제리는 마른 빵을 허겁지겁 먹느라 목이 메었을 노인처럼, 눈을 감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나는 제리가 그다음에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기다렸지.”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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