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185] 아들과 아버지, 포개어진 두 가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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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는 아이는 부서지지 않는다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0-07 06:30:10

아이가 미끄럼틀을 타고 조금 더 아래로 내려왔다. 마침내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그러나 다 내려온 것은 아니었다. 미끄럼틀 원형 통 안에서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더 다가갈까 말까 망설이는 것 같았다. 나는 미소 지어 보이려고 애썼다. 아이와 눈을 맞추고 느리게 그러나 길게 통, 통, 통, 미끄럼틀 바닥을 두드렸다. 깜빡깜빡, 아이가 맑은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았다. 한 번 더 망설이던 아이는 엉덩이를 밀고 내려와 미끄럼틀 끝에 앉았다.

“아파?”

아이가 작은 손을 내밀어 깨진 내 입술을 만졌다.

“으응.”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두 팔로 아이를 당겨 가슴에 와락, 끌어안았다. 만지면 부서질 것 같아서, 안으면 으스러질까 봐 외면했던 이 연약하고 갸륵한 생명을, 처음으로 힘주어 가슴에 품었다. 아이의 가느다란 두 팔이 내 목에 감겼다. 뜨거운 불덩어리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왔다. 내 속에서 생겨난 아이, 내 몸에서 터져 나온 하나의 의지가 이토록 확실하게 내 품에 안겨 있었다. 아이의 달고 여린 숨이 내 가슴 안으로 물밀듯 밀려들었다.

아버지가 왜 나를 끌어안을 수 없었는지 알 것 같았다. “숨을 쉬어! 숨을 쉬란 말이다!” 아버지가 내지른 비명의 속뜻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황망히 아내를 잃어버렸는데 행여 어린 아들마저 놓쳐 버리는 건 아닐까,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끌어안으면 자식마저 으스러지고 깨져 버리진 않을까, 얼마나 무서웠을지, 당신 스스로 아이를 부숴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얼마나 그를 꼼짝 못 하게 사로잡았을지, 내가 낳은 생명을 뒤늦게 끌어안고서야 나는 내 아버지가 꺼내 보이지 못한 깊은 사랑을 깨달았다.

하지만 부서져라, 당신의 품에 끌어안아야 했다. 유리처럼 연약해 보이지만 깨지지 않는다는 걸, 무너질 듯 가냘프지만 이토록 당당히 존재하는 생명이 얼마나 단단하고 대견한 것인지 아버지도 진즉 깨우쳤어야 했다. 레드 삭스와 조니 데이먼을 봤느냐 묻는 대신 절대 꿈을 놓지 말라고, 어떤 일이 있어도 내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해 주었어야 했다. 내게 글러브를 사 주고, 내가 던진 볼을 받아 주며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당신의 목소리로 말해 주어야 했다. 보이지 않는 기도와 들리지 않는 축복으로 사랑을 감추는 대신, 아버지는 아들의 슬픔과 외로움까지 힘껏 품고 쓰다듬어 주었어야 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아들아, 분명히 말해 주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두 가슴이 포개진 만큼 아버지의 인생도 덜 외로웠으리라.

그러나 나는, 그토록 원망했던 내 아버지보다 더 못난 아빠였다. 오늘 밤 내가 사라진다면 아이는 영문도 모르고 나를 그리워할 것이다. 기다림에 지쳐 평생 나를 증오할지도 몰랐다. 뿌리를 찾지 못해 내가 방황했던 것처럼, 이 아이도 이를 악문 채 어둠을 헤맬까. 시린 마음으로 자라서 나처럼 못난 아빠가 되면 어찌해야 할까. 이 아이의 아이도 상처 입겠지. 그 상처를 보면 이 아이는 또 얼마나 아파할까.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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