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커(Bunker)는 전투에 대비한 콘크리트 방어진지를 가리키는 단어다. 은밀한 공간이기에 일반인의 시야에서 은폐되는 게 보통이다. 또한 생명을 구하기 위한 목적인 만큼 건축에 디테일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래서 무뚝뚝하고 미니멀한 매력이 있다.
전쟁이 아니라면 벙커는 영 쓸모가 없는 물건이다. 혼자 낡아가던 벙커는 사람들에게 잊힌 끝에 버려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무용지물이 된 벙커가 최근 하나둘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도시재생 붐을 타고 리모델링을 거쳐 공공시설로 재탄생된 것이다. 전쟁을 겪은 지역이라면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런 벙커 시설을 어렵지 않게 만나 볼 수 있다.
땅굴에서 경험하는 우주! 완산벙커
완산벙커는 전시에 군과 경찰·전북도청 지휘부가 상황을 지휘하기 위해 1973년 전북 전주시 완산칠봉 중턱에 만든 땅굴형 시설이다. 냉전의 산물인 완산벙커가 52년 만에 문화시설로 탈바꿈했다. 우주를 테마로 하는 ‘완산벙커 더 스페이스’가 그것이다.
완산칠봉은 전주 남쪽에 자리한 장군봉·탄금봉·매화봉·옥녀봉 등 7개의 봉우리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후 철수할 때까지 열흘 남짓 경군과 전투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유서 깊은 칠성사를 품고 있으며 정상에는 팔각정 전망대가 있어 전주 시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 현재 완산칠봉은 시민공원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
1970년대는 선진국들이 제2차 세계대전의 상흔을 씻고 경제적 여유를 갖춰가던 때였다. 하지만 한국은 분단 상황이 공고화되면서 이 시기 어느 때보다 반공사상이 투철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전시에 대비해 전국 각지에 군사시설물을 설치했는데 전주시 완산칠봉 산중턱에도 방이 여러 개 연결된 총길이 280m의 벙커가 만들어졌다. 이런 형태를 개미굴 구조라고 한다. 30년 동안 존속했던 개미굴은 2005년 공식적으로 용도 폐기 처분됐다.
벙커의 활용처를 찾던 전주시는 2019년부터 우주 테마의 문화관광시설로 조성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원래는 지난해 개관할 예정이었지만 비가 오면 물이 새고 결로가 발생하면서 4일 개관식을 가졌다.
완산벙커 더 스페이스는 ‘다중우주를 관광객이 탐험한다’는 주제로 LED와 거울을 활용한 ‘차원의 문’ 등 10개의 콘텐츠룸과 무인카페로 구성돼 있다. 개미굴이라는 특색을 살려 우주와 4차원 세계를 탐험한다는 콘셉트의 실감형 미디어아트 공간으로 재탄생된 것이다.
전주시가 직영하는 완산벙커 더 스페이스의 입장료는 성인 기준 1만 원이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운영되며 월요일은 휴무다.
빛이 차단된 자리에 빛이 스미네… 제주 빛의 벙커
태양이 뜨는 마을 성산에는 옛 국가기간시설을 빛과 소리로 새롭게 탄생시킨 문화 재생공간이 있다. 제주도 성산읍 ‘빛의 벙커’는 외부의 빛과 소음이 완벽히 차단된 공간에 고화질 프로젝터를 설치해 벽면·기둥·바닥 등 사방에 명화를 투사하여 역동적인 화면을 만들어 내는 몰입형 예술 전시관이다.
국가기간시설이 그렇듯 처음에는 누구도 몰랐던 곳이었다. 한국통신(현 KT) 해저 광케이블센터와 서버 기지로 비밀임무를 수행하던 이곳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세월의 변화에 따라 통신망에 변화가 오면서다.
쓸모를 다해 감출 이유가 없어진 이곳, 갑자기 출현한 3000㎡의 공간을 살리기 위해 아이디어가 모아졌다. 그리고 2018년 11월 ‘빛의 벙커: 클림트’ 전을 통해 당당하게 문화시설로 데뷔했다. 이 낯설고 기이한 공간을 보기 위해 8개월 동안 56만 명이 방문했다. 이어진 ‘빛의 벙커: 반 고흐’ 전 역시 46만 명을 모으기에 이르렀다.
현재는 빛의 벙커 다섯 번째 전시 ‘샤갈, 파리에서 뉴욕까지’를 진행 중이다. ‘색채의 마술사’ 마르크 샤갈의 예술 세계를 만나 보는 시간으로 가장 문학적인 작가의 작품에 첨단 디지털 기술을 입혀 몰입형 예술로 재탄생시켰다.
몰입형 예술이란 그림을 밖에서 보는 게 아니라 그림 안으로 들어가 내가 그림의 일부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환상적인 체험에는 5억 개에 가까운 픽셀의 이미지를 100만 루멘 이상의 밝기로 쏘아대고 수많은 스피커를 사용해 전시장을 음악으로 가득 채우는 작업이 선행된다. 최근에는 후각을 자극하는 방법까지 동원되고 있다.
빛의 벙커는 벽과 바닥은 물론 기둥까지 전시 공간으로 활용한다. 눈에 보이는 모든 공간이 전시장인 이곳에도 명당은 따로 있다. 출입구를 지나 우측에 자리한 5.5m 높이의 거대한 벽면이 그것이다. 사면과 천장·바닥을 온통 유리로 마감한 미러룸에서 만나는 영상 역시 이색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수방사도 몰랐던 여의도 지하벙커
2005년 4월 서울 여의도에 버스환승센터를 만들던 인부들의 눈에 이상한 구조물이 포착된다. 바닥에 초록색 페인트로 칠한 철문이 떡하니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 문은 콘크리트 계단으로 이어졌고 그 끝에는 알 수 없는 너른 공간이 있었다. 대체 무엇을 하는 곳일까?
모두가 궁금해했지만 언제·누가·왜 지었는지 어떤 기록도 남지 않아 정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국토교통부 지하시설물 열람에도 이 장소만 누락돼 있었다. 심지어 수도방위사령부도 몰랐다고 한다. 그러나 바로 이런 점이 이곳의 정체를 말해주었다. 이곳은 청와대 경호실에서 만든 극비 시설물이었다.
VIP실 80㎡와 수행원 대기실 800㎡ 규모로 조성된 이곳은 1974년 발생한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의 결과물이었다. 대한민국 대통령을 노리는 총탄이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알 수 없었다. 청와대는 국군의 날 사열이 이루어지는 5·16광장(현 여의도공원) 단상 밑으로 굴을 파기로 했다.
이름도 없이 30년간 땅 밑에서 잠자고 있었던 벙커는 2005년 ‘여의도 지하벙커’로 명명되었고 2013년에는 역사적 상징성을 인정받아 서울시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2017년 드디어 그 쓸모를 찾아 서울시립미술관의 SeMA벙커로 거듭났다.
SeMA벙커는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상징하는 시설로 공간의 미학적 특성과 장소를 반영한 프로젝트를 선보여 왔다. 그러나 안타깝게 올해 1월13일을 끝으로 운영을 종료했다. 향후 다른 용도로 재탄생될 예정이다. 출입 역시 통제돼 지금은 외관을 감상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유리로 된 외관은 지하도라기엔 좀 고급스럽고 미술관이라기엔 다소 밋밋하다.
바르셀로나의 명물이 된 카르멜벙커
세계적인 관광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도 세계적인 벙커 여행지가 있다.
해발 262m의 낮은 산언덕에 자리 잡은 카르멜벙커(혹은 투로 데 라 로비라·Turó de la Rovira)는 스페인 내전(1936~1939) 당시 대공 방어시설(DECA)로 건설되었다.
스페인 내전이 종식되면서 집 없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한때 판자촌을 이루기도 했으나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계기로 깨끗하게 정리됐다. 우리나라가 88올림픽을 앞두고 서울 시내 판자촌 대다수를 정리한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카르멜벙커는 바르셀로나 전역을 굽어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전 세계인이 찾는 야경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최근에는 오버투어 문제로 밤 출입을 통제해 일몰과 함께 하산해야 한다는 점은 아쉽다.
카르멜 벙커는 구엘 공원에서 일반인 주거지를 따라 15분 정도 걸으면 닿을 수 있다. 따로 문화시설을 들인 것은 아니지만 위치적인 이점과 힙한 외관으로 많은 관광객의 사랑을 받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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