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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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돈은 모인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나는 불법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오! 내가 죽은 뒤에 반드시 기이한 일이 일어날 것이외다!”
이차돈의 목소리는 하늘에서 구름을 뚫고 들려오듯 은은하면서도 우렁찼다. 깊고 풍성한 울림이 사람들 마음속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말처럼 이적(異蹟)이 일어나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게 했다.
형장의 한편에는 이찬을 비롯한 대신들이 천막 아래 앉아서 처형을 지켜보고 있었다. 철부는 형리에게 형을 집행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형리는 참(斬)이라 쓰인 패를 들었다. 망나니는 칼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칼날이 햇빛을 잠시 가리자 이차돈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막상 눈앞에 닥치니 죽음이라는 것이 산책을 가는 것만큼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비로소 해탈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차마 벗의 목이 떨어지는 모습을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리고 있던 진석의 귀에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경악에 찬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저럴 수가! 핏빛이 젖과 같다니!”
이차돈의 잘린 목에서 타락죽처럼 흰 피가 솟아나고 있었다.
이 경이로운 장면을 본 사람들은 두려운 가운데 감동했다. 그 자리에서 마음으로 불법을 받아들이는 이가 속출했다. 흰 피가 흘러내려 바닥을 적시듯 이차돈의 불심이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진석도 그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친구의 죽음은 그를 완벽히 다른 사람으로 변모시키는 계기가 됐다.
술과 사람을 좋아하고 사냥과 천렵을 즐기던 진석은 이후로 자신을 송두리째 불교에 바쳤다. 그는 명문대가의 자제가 아니라 한 사람의 불자로 다시 태어났다.
후일의 이야기지만, 진석은 출가하여 각덕(覺德)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각덕은 신라 승려로는 최초로 불법을 구하기 위해 양나라로 갔다. 그는 곳곳을 다니면서 여러 고승에게 가르침을 받아 불법의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서력 549년, 각덕은 양나라 사신과 함께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가지고 귀국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최초로 들어온 불사리였다. 그 당시 진흥왕은 백관과 함께 이를 맞아들여 흥륜사에 안치했다.
이차돈의 목에서 흰 피가 용솟음치는 것을 본 이찬을 비롯한 중신들은 기절초풍했다. 철부는 믿기지 않아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했다. 바닥에 흘러내린 피는 역시 우윳빛을 띤 흰색이었다.
이찬은 끝 모를 두려움에 빠져들었다. 당장 마른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치고 머리 위로 벼락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철부는 안색이 창백해지면서 몸을 가누지 못했다. 옆에 있던 파진찬 막석이 그를 부축하며 물었다.
“어디 안 좋으십니까?”
“아니오. 잠시 현기증이 났을 뿐이오.”
철부가 힘없이 말했다.
“이제 돌아가십시다.”
철부는 쫓기기라도 하듯 황급히 자리를 떴다. 대신들도 어미 닭을 쫓는 병아리처럼 서둘러 뒤를 따랐다.
법흥왕은 이차돈의 처형과 이적에 대해 보고를 받고 슬픔과 함께 경이로움을 느꼈다. 듣던 대로 불법의 세계는 광대무변(廣大無邊)했다. 그 속에는 한 젊은 불자의 위대한 희생정신과 높은 기상도 담겨 있었다.
법흥왕은 신하들을 둘러보았다.
“그대들도 이번 일로 불법의 오묘함과 신비로움을 체감했을 것이오. 짐은 불법을 받아들여 그 심오한 도를 따르고 백성에게 널리 평화와 복을 전하도록 할 것이오. 누구든 이견이 있으면 지금 말씀하시오.”
기이한 일을 체험하고 두려움에 휩싸인 대신들은 누구도 국왕의 뜻을 반대하지 못했다.
법흥왕은 마침내 불교를 공인하고 만방에 알렸다. 이때가 서력 528년이었다.
법흥왕은 지난날 비화 부인을 따라갔던 시종들의 보고를 통해서 가야의 사정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었다. 그는 가야를 병합하고 싶었지만 연맹에 속한 나라들이 단단히 결집해 있었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대가야와 다른 소국들을 이간시킬 계획을 꾸몄다.
법흥왕은 먼저 가야연맹 각국에 흩어져 있는 시종들에게 비밀리에 명을 내려 신라의 의관을 입게 했다. 이를 본 소국의 왕들은 대가야가 신라와 굴욕적인 밀약을 맺은 것으로 의심하게 됐다. 그렇지 않고서는 가야 각국 조정에 몸담은 자들이 공공연히 신라의 의관을 입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대가야와 소국 간에 본격적으로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탁순국왕(卓淳國王) 아리사등(阿利斯等)은 신라 출신 시종이 버젓이 신라의 복식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대로했다.
아리사등은 시종을 불러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신라의 의복을 입고 있느냐?”
시종이 거만하게 대답한다.
“이것은 이미 대가야 왕과 우리 폐하께서 약조한 일입니다. 대가야 왕께서 예전부터 신라 문화를 사모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시종이 이처럼 거짓말을 한 것은 모두 법흥왕의 계략이었다.
아리사등은 대로하여 대가야 왕에게는 일언반구의 말도 없이 탁순국에 체류하고 있는 신라에서 온 시종들을 모두 추방했다.
탁순국에서 시종들이 쫓겨오자 법흥왕은 드디어 가야를 칠 빌미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법흥왕은 즉시 대가야에 사신을 보내 이 일을 따졌다.
“짐이 보낸 사절을 별 이유 없이 내쫓은 것은 동맹 관계를 유지할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소. 그렇다면 우리 왕녀(王女)를 돌려보내시오. 귀국과의 동맹에 종지부를 찍도록 하겠소.”
당시 비화 부인은 슬하에 아들을 하나 두고 있었다. 이뇌왕은 아이의 이름을 월광(月光)이라 짓고 애지중지 키웠다.
대가야 왕은 당황하여 변명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하늘의 뜻에 따라 부부로 짝지어졌는데 어찌 헤어질 수 있겠소. 게다가 어미가 아이를 두고 어디를 간단 말이오. 이번 일은 탁순국 왕이 독단적으로 행한 것이지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소이다.”
이는 연맹의 맹주가 할 말은 아니었다. 어떤 나라가 보호해 주기는커녕 책임을 전가하는 맹주에게 충성을 바치겠는가. 이뇌왕의 변명은 가야연맹 맹주의 자리를 위태롭게 하는 어리석은 대응이었다.
신라의 사신은 그 말을 듣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직접 그들에게 책임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이뇌왕으로서는 이미 탁순국을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할 말이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보고받은 법흥왕은 즉시 이찬 철부를 시켜 탁순국을 치게 했다.
철부는 군사를 이끌고 탁순국으로 향하다가 길목에 있는 탁기탄국(琢己呑國)을 들이쳤다. 이 나라는 가야와 신라의 접경 지역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날벼락을 맞은 것이었다.
탁기탄국 왕 함파한기(函跛旱岐)는 도성인 도가성을 굳게 지키며 대가야의 구원병을 기다렸다. 이에 철부는 공격을 멈추고 성에 침투시켜 놓았던 간자를 이용해 대가야가 이미 탁기탄국을 포기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진작부터 대가야를 의심하고 있던 탁기탄국 왕은 구원병이 오지 않으리라는 소문을 듣고 싸울 의욕을 잃었다. 어차피 승산이 없다면 신라에 항복해서 백성을 무사히 지키는 게 상책이었다. 결심을 굳힌 함파한기는 성문을 열고 신라군에 항복했다.
철부는 탁기탄국 왕과 그의 식솔을 금성으로 보냈다. 군사들에게는 점령지 백성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도록 주의하라 엄명을 내렸다.
도가성이 함락되자 주변의 거도성과 고파성도 속속 신라군에게 항복했다. 이로써 탁기탄국은 완전히 신라의 손에 넘어갔다.
탁순국의 아리사등은 탁기탄국이 무너졌다는 소식에 겁을 먹고 가야 남부의 안라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항상 가야연맹의 맹주가 되고자 했던 안라국은 신라와 대가야의 밀월 관계를 두려워했었다. 그래서 안라국은 이들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 일로 가야의 남부 소국들은 대가야에 등을 돌리고 안라국을 중심으로 뭉치게 됐다.
안라국은 그동안 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대외무역을 통해 힘을 축적해 왔다. 이번 탁순국의 구원 요청은 대가야를 밀어내고 가야연맹의 맹주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호였다. 안라국 왕 함물명(咸勿明)은 신라의 탁기탄국 침략으로 발생한 분쟁을 외교적으로 풀기 위해 앞장섰다. 그는 백제·신라·왜 등에 사신을 보내 회담을 요청했다.
한편 백제에서는 무령왕이 재위 23년 만인 서력 523년에 타계하고 그의 아들 명농(明濃)이 왕위에 올랐다. 이가 바로 백제 제26대 임금인 성왕(聖王)이다.
성왕은 등극하자마자 선왕의 뜻을 이어 백제 부흥을 천명했다. 그는 근초고왕 때처럼 서방을 널리 아우르고 고구려를 제압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었다. 그 첫걸음이 바로 산동에 거점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 당시 서방에서는 북위의 세력이 점차 약화하고 있었다. 낙양 천도 후에 북방의 유연·남방의 남조와 수차례 전쟁을 치르면서 북위의 백성은 군역과 부역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관리들의 수탈이 극심해지면서 참고 있던 백성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들의 봉기는 육진(六鎭) 중 하나인 회황진(懷荒鎭)에서 시작해 다른 진으로 퍼져 갔다.
백성의 봉기는 관군의 잔혹한 진압으로 실패로 돌아갔지만 북위 정권은 붕괴의 국면으로 접어들게 됐다.
총명하고 시야가 넓은 성왕은 북위의 상황을 재빨리 간파했다. 그동안 주춤하고 있던 산동의 백제 세력을 규합해 대륙으로 세력을 확장할 절호의 기회였다.
성왕은 은밀히 산동 성양의 백제관에 전령을 보내 요서를 공략하는 계획을 타진했다. 산동의 군대로 하여금 서변을 공격하게 함으로써 고구려가 남쪽으로 눈을 돌릴 수 없게 하는 방책이었다. 하지만 백제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고구려가 가만히 손 놓고 있을 리 만무했다.
고구려 안장왕은 먼저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선공했다. 고구려군이 국경을 넘었다는 소식을 들은 성왕은 좌장 지충(志忠)을 보내 이들을 막게 했다. 보기 1만을 거느리고 대수로 나아간 백제 장군 지충은 진을 치고 기다리다가 무턱대고 강을 건너오는 고구려군을 크게 격파했다. 고구려는 초전에 패해 전의를 상실해서 군사를 물려야 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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