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도전은 34세에 원 사신을 영접하라는 명령을 거부한 죄로 유배되었다. 봉화와 나주 등지에서 2년 4개월간 머무는 동안 그는 백성의 삶을 생생히 목격한다. 이때의 경험은 훗날 정도전이 위민과 민본 이념을 실천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된다.
유배에서 풀려난 정도전은 함경도 함흥의 신흥 무관 이성계를 찾아가 그를 중앙정치에 끌어들인다.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가 권력을 쥐면서 두 사람은 사전(私田)을 근절시키는 등 토지개혁을 추진한다. 이는 왕조 교체의 도화선이 되었다.
정도전은 불교 척결을 강하게 추진하는 과정에서 탄핵되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조선의 개국공신 중에서도 맨 앞줄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왕권을 제약하고 신권을 강화하자는 정도전의 생각은 왕실의 반대에 부딪히고 결국 이방원이 일으킨 정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도전 또한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로써 정도전이 꿈꾸고 태조가 동의했던 정치는 그 시도조차 해보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하지만 저자인 이익주는 정도전의 ‘경국대전’ 31면을 들어 “재상의 지위와 역할이 강조되고 언관의 활동이 폭넓게 보장되었으며, 두 차례의 반정은 혁명까지는 아니라도 국왕에게 정치의 책임을 물은 것으로 정도전이 이루고자 했던 책임정치가 실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로 그를 혁명적 정치사상가로 추어올린다.
후원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