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156] 하룻밤 함께한 여자와 아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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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인생을 사랑하게 된 순간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8-20 06:30:20

드디어 햇빛이었다. 어비수스를 떠나 5분 정도 달린 후였다. 자동차는 지하 주차장을 떠나 바로 지상의 도로를 달리는 것이 아니었다. 하저터널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어둠을 비추는 조명이 휙휙 지나갈 뿐 바깥 풍경이나 자연광은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반대편 차선에 트러스트 미 본부로 들어가는 자동차인 듯 마주 오는 불빛들이 간간이 꼬리를 물었다. 일정한 속도로 달리던 하운이 브레이크를 밟아 속력을 줄이고 신호대기를 기다리는 듯 멈춘 것은 정면에 막다른 길이 나타났을 때였다. 가로막고 있던 벽이 자동 셔터처럼 위로 올라가며 길을 열었다.

하운이 욕실에 들어간 사이, 나는 책상 서랍에서 커터 칼을 찾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 전 안대를 착용했지만 아침에 뚫어놓은 작은 구멍들을 통해 나는 모두 볼 수 있었다. 눈앞에 나타난 것은 뜻밖에도 한적한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운이 왼쪽으로 핸들을 돌렸고 다시 오른쪽으로 회전해서 차단 바를 통과하자 더 넓은 지하 주차장이 나타났다. 주차하고 출발하려는 사람들과 주차요원들이 보였다. 하운은 망설임 없이 주차장을 가로질러 경사진 출구로 올라섰다.

하늘과 한강, 시민 공원과 강 건너 마포의 빌딩들. 놀란 나는 등을 반짝 세웠다. 어비수스는 지하도시다? 트러스트 미는 63빌딩 지하 주차장과 연결되어 있다! 하마터면 나는 큰 소리로 외칠 뻔했다. 나는 발설하지 않기 위해, 더 많은 의문들을 쏟아 내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꽉 물어야 했다. 그렇다면 아침에 본 하늘과 구름과 새벽빛은, 찬란하던 햇빛은 무엇이었을까.

어비수스를 나오기 전 늦은 아침, 하운과 함께 R구역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뷔페 레스토랑은 시원하게 물줄기를 쏟아 내는 폭포까지 갖춘 거대한 온실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다. 높은 천장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온실은 물론 유리 벽으로 둘러싸인 식당 내부까지 넉넉히 채웠다. 정원수들은 초록으로 반짝였고 산수유는 노랗게 꽃을 피웠다.

식사를 마친 사람들은 온실 카페로 자리를 옮겨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거나 느릿느릿 산책을 하거나 벤치에 앉아 책을 읽었다. 흰색 함박꽃나무 가지에 앉은 파랑새들은 한가롭게 지저귀고 호랑나비들도 라일락 향기를 찾아 날아다녔다. 자주달개비와 원추리가 공원 곳곳에 환하게 피어 있는 온실의 계절은 봄이었다. 대체 이곳은 어디일까. 궁금했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오늘이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는 말 또한, 하운도 나도 하지 않았다.

나는 토스트에 오렌지잼을 발라 놓고도 말없이 블랙 커피만 마셨다. 하운은 에그 스크램블에 토마토케첩을 듬뿍 뿌려 한 스푼 입에 넣었다. 오물거리는 입술에 붉은 케첩이 묻었다. 내가 손을 뻗어 그녀의 입에 묻은 것을 손가락으로 닦아 준 뒤 냅킨을 꺼내 닦았다.

“같이 가자고 하지 마요. 결혼식장은 악몽이에요.”

하운이 머리를 가로저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만약 내가 육체가 아닌 하운의 인생을 사랑하게 되었다면 바로 이 순간을 기억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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