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175] 아내와 열애 중인 사내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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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이는 뭐가 돼도 될 거라는 환상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9-20 06:30:10

대여섯 개의 계단을 올라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오전 예배와 학생 예배까지 끝나고 저녁 예배는 아직 시작 전이어서 교회는 거의 텅 비어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 함께 1박2일 여행을 했더라도 달봉은 아침 일찍 돌아와서 주일예배를 주관했을 것이다. 이만한 규모라면 또 다른 목사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목사가 주말여행이라니…. 아내에게 빠져도 단단히 빠졌구나, 새삼 울화가 치밀었다.

그때 교회 앞에 승합차 한 대가 멈춰 섰다. 나는 교회 안으로 몸을 숨기고 밖을 내다보았다. 달봉이 차에서 내리고 몇몇 사람이 따라 내렸다. 달봉은 성경책과 찬송가를 한 손에, 다른 손에는 검은색 작은 가방을 들고 있었다. 검은 상복을 입은 사람들을 보아 장례식 예배에 다녀오는 길 같았다. 수고 많았다는 인사말과 설교가 좋았다는 덕담, 덕분에 망자가 천국에 잘 갔을 거라는 안도의 말들이 오갔다. 노파는 구부정한 허리를 더 깊이 굽혀 인사를 했고 중년의 남자는 달봉과 악수를 나눴다.

달봉은 승합차가 떠나고 그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예의 바르게 배웅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꽤 의젓하고 신뢰할 만한, 목사로서 딱 어울리는 달봉의 낯선 모습이었다.

어릴 적 달봉이는 나의 동지는커녕 적수도 되지 못했다. 천방지축 제멋대로 교회와 동네 구석구석을 쓸고 다니며 달봉이가 온갖 천덕꾸러기 짓을 하는 동안 나는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섭렵했고 하루하루 대견하고 의젓해졌다. “목사님은 왜 저 녀석을 혼내지 않느냐”고 마을 사람들이 달봉이를 가리키며 혀를 찰 때 나는 상대적으로 싹수 있는 놈으로 비교되어 속으로 우쭐거렸다. 어머니의 빈자리가 남긴 외로움과는 별개로 타인에게서 인정받는 시선의 즐거움을 알아 버린 것도 그즈음이었다.

“누가 목사님 아들 아니랄까 봐. 저 아이는 뭐가 돼도 될 거야.”

어머니를 잃은 뒤 조심스럽게 나를 염려하던 사람들의 시선은 곧 감탄으로 바뀌었다. 더구나 달봉과 비교되면서 아버지에 대한 존경이 나에 대한 기대와 인정으로 옮겨 온 것 같았다. 나는 점점 더 말을 아꼈다. 어른들이 묻는 말에만 깍듯이 “예” “아니오” 짧게 대답했고 아이들과 같이 있을 때는 고개를 젓거나 눈을 깜빡였다. 그럴 때면 조무래기 아이들과 달리 나는 우월한 별에서 온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스스로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상실감에서 기인한 결과였지만, 나를 향한 사람들의 감탄해 마지않는 시선과 칭송이 내가 취해야 할 행동의 방향을 결정하고 독려했던 것도 원인이었다. 대견해하는 주변의 눈빛이 강렬히 쏟아질수록 나는 더욱 굳게 입을 닫고 더 먼 곳을 응시하는 모습을 연출하곤 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반항심과 위선에 대한 조소가 독처럼 번지고 있으면서도 더 점잖고 더 뛰어나야 한다는 묘한 경쟁심이, 슬픔을 토해 내고 고통을 발설하고 싶은 원초적인 열망을 감추도록 부추겼다.

과묵하고 어른스러운 척 의젓한 태도, 조금도 즐겁지 않으면서도 타인에게는 지식과 친절을 과시하려는 외향적인 면도 함께 자라기 시작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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